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채리에게.
너의 첫 편지 잘 받았어. 세상이 좋아서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오는 편지가 이렇게나 빨리 도착하다니. 네가 진짜 국제 펜팔을 쓰던 그때와는 아주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 전화기로 다른 나라의 사람과 얼굴을 보며 통화까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말하니까 꽤나 나이 든 사람 같군. 뭐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말이야.
'임경선 작가와 요조 작가의 교환일기' 책은 역시나 우리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 나도 책을 보는 내내 네 생각을 했거든. 요조의 뜨거움이나 실망감 같은 것들이 내 성격과 닮아있고, 임경선 작가가 말하는 것들이 왠지 네가 나에게 하던 조언들과 그 온도가 비슷하다고 느꼈거든. 나는 너의 그 냉정한 비판과 객관적인 말들이 꽤나 좋았어. 그래서 네가 교환일기를 써보자고 했을 때 엄청 기뻤어. 그리고 많이 설레었어.
사실 나는 요즘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기력보다는 절망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아. 최근에 16년을 기르던 강아지를 하늘로 보냈고... 잘 쓰고 있던 소설이 1차 탈고를 하면서 나의 실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몸이 묶여 기분 전환 삼아 늘 하던 여행도 못하게 되었어. 삶의 희망을 모두 잃은 기분이 이럴까 싶어. 강아지 한 마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살아내던 일상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야.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모르겠다는 상실감이 꽤나 커. 주변 사람들에게 어두운 기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밝은 척을 해대곤 했지만 사실은 참 내가 괜찮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을 요즘 많이 받고 있어.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야지. 행복해야지. 행복을 위해서 꾸준히 고군분투하는 게 우리가 살아내는 이유가 아닐까... 하면서. 그렇게 꾸역꾸역 일상을 보내고 있어. 그런데 너와 교환 일기를 쓴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마구 설레더라. 일상의 소확행을 하나 얻은 기분이랄까.
너도 나와 다르지 않게 설렘을 느껴서 육아에 지친 상태로 새벽 1시에 빨리 일기를 써서 보낸걸 보니 설렘 이상으로 안달이 났더구나, 일어나자마자 답장 안 보내냐고 메시지까지 보낸 걸 보면 말이야. 풉.
우리는 오래 알았지만 짧게 만났고 또 짧게 만났지만 깊이 알고 지내서 그런지 네가 참 편하고 좋아. 아주 많이 다르지만 결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걸 좋아하는 취미가 같다는 이유가 나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 요즘 읽은 괜찮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책임의식을 느끼는데 글을 쓰느라 연애소설만 주야장천 읽었더니 좋은 책을 많이 추천해주지 못해 아쉬웠어. 어서 무기력증을 극복해서 더 좋은 책을 많이 발견해보도록 할게 :-)
오늘도 시호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어미에게 이유식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겠구나. 그러면 너는 이유식을 먹이고 시호가 노는 동안 커피를 타서 먹는 아침을 보내겠지. 나는 일요일이라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들어와서 피곤한 상태란다. 여긴 밤이니까, 이만 줄일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