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네가 강아지를 먼저 보내고 아닌 척 굴어보려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힘들고 무기력한 하루하루들을 살아내고 있다는 글을 보니 드라마에서 어른들이 하던 그 말이 생각나더라.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살긴 살지. 뭐 어떻게든 살기야 하겠지.
근데 사실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잖아? 이병률 시인 책에서 '그저 흰 죽 같은 시간이나 떠먹으면서' 사는 시간을 보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말이야. 사실 그 문장이 너무 기발하다고 생각해서 적어뒀거든? 와.. 어떻게 그런 표현을 생각했을까! 역시 시인은 천재라니까!! 하면서 밑줄도 긋고 글귀 노트에 적어두기도 했는데 도무지 그 문장이 공감은 안 가더라. 그래.. 나는 흰 죽보다는 김치낙지죽 같은 시간이 좋은 사람이야. 정확히는 흰 죽 같은 시간은 견디기 힘든 사람이지. 아무 의욕이 없는 무기력함은 나에겐 얼마쯤 공포의 대상이기도 해.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해봤어. 딱 이번 주까지만 이러고 나면 다시 활기를 찾을 거야, 라는 보장만 있으면 흰 죽 같은 시간을 심지어 즐겨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곧 제자리로 돌아올 기분이라면 이 우울감에 더 깊이 들어가 그 끝엔 뭐가 있나 좀 만나보기도 하고, 강아지를 먼저 보낸 슬픔도 더 짙게 느껴보는 거지. 그래 봤자 다음 주엔 다시 괜찮아질 거니까. 죽음이 있어야만 역설적이게도 삶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되는 거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흰 죽 같은 시간이야. 다음 주면 다시 김치낙지죽 같은 시간이 펼쳐진다고.'라고 한다면 마치 흰 죽 같은 시간이 휴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내는 이유라고 했지? 찾았다! 우리의 대화가 즐거웠던 이유. 삶을 돌보고 아끼는 태도 때문이었어.
언제부턴가 나에게 '행복 강박증'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어. 그냥 사는 거지 뭘 꼭 행복해야 해??라고 나 스스로에게 반문했는데, 응! 난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더라. 그 감정이 꼭 '행복'일 필요는 없는데 적어도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 라는 느낌이 있어야 하더라고. 그래서 요즘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아기를 출산하고 애만 보며 지내온 지난 5개월에 이어서 코로나까지 터져버린 거야. 파나마는 코로나 때문에 통행금지를 시행하고 있어. 집 앞 공원도 나갈 수 없고 매일 아침 창문 앞에 서서 바깥공기를 집어삼킬 뿐이지. 집에서 드라마 몇 편을 정주행 했는지 몰라. 그야말로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보면서(넷플릭스는 알아서 다음 회차로 넘어가니까 중간에 도저히 TV를 끌 용기가 나질 않더라) 2주를 넘게 보냈어. 그리고 결국 와버린 거지. 무기력함이.
무기력함을 이기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어. 근데 대체로 그 '뭐라도'는 무용한 것일수록 효과가 좋은 것 같아. 한다고 해서 누가 돈을 준다거나 알아주지도 않는 그런 것들 말이야. 우선 책을 읽었어. 네가 그랬지? 애 키우면서 책 읽을 시간이 있냐고. 그리고 내가 답했잖아. 책을 읽지 않았더니 내 영혼이 피폐해진다고. 책만 읽어도 마음이 아주 지독해지는 상황은 피할 수 있더라. 그리고 줌바를 시작했어.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 유튜브 속 선생님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신나게 라틴음악에 내 궁둥이를 흔들어재끼는 거야. 애가 자는 시간에 하는 이유는, 애가 놀고 있을 때 했더니 흔들어대는 날 보면서 막 울더라고. 엄마.. 제발 그러지 마...라고 말하는 눈물 같았어. 5개월밖에 안 산 아이한테 내가 너무 참혹한 흔듦을 보여준 건가 싶어서 이제는 아기가 잘 때 하고 있어. 아직 내 체력으로는 30분도 채우지 못하고 뻗어버리지만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기로 자신과 약속했어. 그리고 요리를 시작했지. 한 가지 메뉴를 정해서 몇 번 연습을 해보는 식으로 수련을 하고 있어. 나는 이제 겉절이를 담글 줄 알고(3회 연습) 수육을 삶을 줄 알며(4회 연습) 오늘은 소갈비찜을 처음 해봤어(역시 아직은 미흡한 맛. 두세 번의 추가 연습이 요구됨). 다음 메뉴는 냉채 같은 건 어떨까 생각 중이야. 한 상에 수육과 갈비찜을 올렸을 때, 이제 상큼한 어떤 메뉴가 필요할 것 같지 않니? 응.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손님 접대용 메뉴만 하나씩 연습 중이야. 난 수육과 갈비찜을 할 줄 알지만 김치볶음밥은 못하는 여자라서 변진섭 오빠에게 매력 어필하긴 글렀어. 거기에 이어 너와의 교환일기를 시작하며 무기력증 극복 프로젝트(?)의 화룡점정을 찍었다고 할 수 있지. 이건 뭐 이제 무기력함이 들어올 틈이 없어. 너에게도 이 펜팔이 일상의 소확행으로 다가갔다니 다행이야. 주변 사람에게 어두운 기운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만큼 스스로에게도 건강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자!
자! 그럼 난 이제 아기 젖병을 닦고 줌바 한 판 신나게 당기러 간다!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