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윤무곡>, 왜 라이벌과의 로맨스로 제작했을까?

by 체스넛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신규 애니메이션 <프리즘 윤무곡>을 아내와 함께 즐겨보고 있습니다. <꽃보다 남자>의 카미오 요코 작가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소식에 호기심으로 시작한 작품이었죠. 예쁜 그림체와 성우들의 열연은 훌륭했지만, 솔직히 스토리 자체는 이른바 '아는 맛'이었습니다. 전개는 예측 가능했고,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곳곳에서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보았던 이 댓글이 떠올랐습니다. "같은 국밥이라도 누가 끓이느냐가 중요하다." 비록 익숙한 맛일지라도 이 작품은 충분히 맛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클리셰가 왜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받는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로맨스에서 전형적인 장치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 입가에 번지는 '아빠 미소'는 부정할 수 없는 즐거움이니까요. 물론 이 작품에도 뻔하지 않은 디테일은 존재합니다. 감상 도중 저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제작진은 여주와 남주를 '일방적이고 순한 라이벌 관계'로 설정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라이벌' 관계

먼저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봅시다. 왜 로맨스물은 남녀 주인공을 라이벌로 묶어둘까요? 저는 그 답이 '관심의 강제성'에 있다고 봅니다. 라이벌이란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끊임없이 의식하고 관찰해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집요한 시선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싹트기 위한 최적의 전제 조건인 '지속적인 관심'이 됩니다.

관객 입장에서 이 구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상대를 꺾기 위해 시작된 관심이 서서히 애정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니까요. 감정의 방향이 정반대로 뒤집히는 서사는 시청자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관객은 이미 '이들이 언젠가 사랑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그 변곡점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를 기대하며 작품에 몰입하게 됩니다.



'일방적이고 순한' 라이벌 관계

최근의 트렌드, 특히 웹소설이나 웹툰 쪽은 이른바 '매운맛' 라이벌 관계가 대세입니다. 또한 '일방적'인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을 은근히 무시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여주 혹은 남주가 '내가 노력을 많이 한다' 외에도 '저 XX를 적극적으로 방해한다'도 전략으로 선택하게 만들죠. 서로를 증오하거나 극단적인 방해를 일삼아야 나중에 사랑이 확인됐을 때의 자극이 극대화되기 이렇게 설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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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프리즘 윤무곡>의 라이벌 관계는 일방적이고 순합니다. 여주인공 '릴리'는 영국 유학 생활을 지키기 위해 전교 1등인 '키트'를 반드시 미술 실력으로 꺾어야 하지만, 천재적인 키트는 릴리를 라이벌로조차 인식하지 않습니다. 릴리는 키트를 이기기 위해 그를 방해하는 대신 그의 비법을 배우려 노력하고, 키트는 그런 릴리를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죠.

자극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는 이 '순한 맛' 설정에는 제작진의 치밀한 힘 조절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로맨스만큼이나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드는 힘

제작진은 릴리의 '성장 아크(Growth Ark)'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낯선 타지에서 꿈을 이루려 분투하는 노력형 소녀 릴리는, 타고난 천재인 키트보다 관객이 이입하고 응원하기에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녀의 라이벌 의식이 '순한' 이유는 릴리의 본성이 선하고 풋풋하기 때문입니다. 키트를 향한 질투마저 배움의 열정으로 승화시키는 릴리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가 미술 공부를 하든 연애를 하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게 만듭니다. '순한 라이벌 관계'는 결국 주인공의 무해한 매력을 극대화하여 관객을 작품 속에 안착시키는 장치인 셈입니다.

2036613928_370de7d1_98-webp.jpg 주인공 릴리
G8_IFh7bEAEGFW0.jpg 남주 키트


마치며

저는 자극적이고 신선한 소재를 좋아하지만, 가끔은 이런 '아는 맛'이 주는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 익숙한 문법의 콘텐츠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니까요.

<프리즘 윤무곡>은 바로 그런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비록 새로운 충격은 없을지라도, 따뜻한 위로와 풋풋한 설렘을 찾으시는 분들께 이 '익숙하지만 맛있는' 국밥 같은 애니메이션을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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