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니 너무 치졸했다.
몇 시간 전, 제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무언가'를 덜어내기 위해서 일단 뭐라도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무언가'를 문장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 되더군요. 그래도 이와 관련된 파편화된 텍스트를 뽑자면 아래와 같아요.
AI
대체
실직
불안정
잉여 인간
스타트업 정신
'가설 - 실험 - 검증'의 사이클을 빠르게 실행하는 자
에세이보다는 서사가 있는 소설이 제 작가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장르는 SF.
주제는 '기술이 불러올 불평등'.
어디에 연재하지? 웹소설을 쓸까? 문피아? 아니, 거기에 연재하면 욕만 먹고 끝나겠지.
그럼 브런치에 올리자.
일단 그렇게 마음먹고 대략적인 스토리 얼개를 짰습니다.
주인공은 30대 남성.
시간적 배경은 대략 2060년?
AI와 로봇의 발전으로 수십억 명의 인구는 서서히 죽어가는 '가치 없는' 쓰레기로 전락해.
'일론 머스크'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신인류'가 되어서 기술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이렇게 계급이 나뉜 지 한 15년 정도 됐지.
우리 주인공은 15년 전에 당시의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되는 뭔가를 개발했어. 이 공로로 그는 '신인류'가 될 자격을 얻게 돼.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신인류' 자격을 박탈당하고 '쓰레기'들이 사는 대륙으로 추방.
그리고 그 대륙에서 동료들을 만들고 대륙 안에서 영향력을 확보해서 '쓰레기'들과 함께 '신인류'를 몰락시키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주인공과 동료들은 '신인류'의 압도적인 기술력에 패배하고 주인공은 '쓰레기'들과 함께 살처분당하는 암울한 엔딩.
대충 이런 흐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쓸 때,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명확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글을 완결까지 쓸 원동력을 확보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 글을 쓰고 싶은 이유에 대해서 깊게 고민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제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무언가'를 덜어내기 위해서"
그게 뭔데?
바로 막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시 제가 작성한 스토리 얼개를 읽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 이름: '일론 머스크'
실제로 일론 머스크를 스토리에 등장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저는 분명 그가 상징하는 '무언가'를 비판하고(비꼬고) 싶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무언가'를 더 구체화시켰습니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제 마음속에 있는 이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깊게 탐구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텍스트 에디터에 제 감정과 생각을 무작정 쏟아냈어요. 그 텍스트 토사물을 다시 읽어보고 제미나이에게 정리해 달라고 부탁해 보니, 아래와 같은 욕망을 발견했습니다.
일론 머스크 - 새로운 도전 - 스타트업 정신 - 빠르게 가설을 실험하고 검증하기 - 비효율 혐오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태동한 스타트업 문화를 비꼬고 싶다.
내가 믿지 않는 가치를 위해서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가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든 그들이 원망스럽다.
글로 써보니 정말 기가 막힌 결론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실망스러웠어요.
이게 왜 '스타트업 문화' 때문이지?
'가설 - 실험 - 검증'을 빠르게 반복해라.
따지고 보면, 내 머릿속에 '스타트업 문화'라고 자리 잡힌 관념은 '부지런히 노력해라'로 요약할 수 있는 '바람직한 직업윤리'잖아?
'내가 믿지 않는 가치'는 무엇이고, '극한'은 어디까지며, '겨우 생존'하는 상태는 또 뭐고?
여기서 생각을 더 이어갔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결론을 낼 수 있는 안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런 자문자답은 처음이 아니거든요) 텍스트 에디터를 끄고 생각을 그만뒀습니다.
사실 이 글을 굳이 공개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세상'이라는 동굴에서 헤매며 쏟아부은 시간들이 아까워, 무의미한 낙서일지라도 저만의 메시지를 남겨보고 싶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