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정률 Feb 10. 2023

그렇게 평범한 엄마가 되었다

너에게 이제야 대답해 본다


“너는 아이를 낳고 평범한 엄마로 살 것 같아”


이것은 나에게 가장 무용한 문장이자 유용한 문장이다. 이것이 지금 나의 현재이기 때문에 무용하고, 내가 이 문장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유용하다. 비난의 문장이었다. 그의 문장 속의 ‘엄마’는 무언가를 포기한 자들의 이름이었다. 자기를 남김없이 쓸 것, 새로운 것을 만들 것, 평범을 거부할 것, 얽매이지 말 것. 그가 살고 싶은 세계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희생을 선택하고 견디는 이들의 호칭이었고 타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마는 약자였다. ‘너는 다 쓰여지지 못한 페이지가 될 것 같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사이에, 그가 같이 뱉어낸 담배 연기처럼 매캐하게 찌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손가락 끝에 비스듬히 가시가 꽂혀버린 것처럼 화끈거렸다. 나는 그를 아꼈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과 내 미래를 겹쳐놓기도 했다. 그래서 아팠다. 엄마라는 것이 어쩌면 나에게도 누군가의 가치를 깎아내라는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그 문장이 어설픈 우리를 갈라두었다.


그것은 너무도 생생하고도 폭발하는 질문이 되었다. 아이가 아픈 이유가 내가 빨리 모유수유를 끊어서였다고 생각될 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 없는데 몇 번이고 “엄마가 미안해”를 말하고 있을 때. 어떤 날에 그 모든 것이 다 미안할 때. 옷장에 입을 수 있는 옷이 몇 벌 밖에 남지 않았을 때. 아이를 재우려고 두 시간을 컴컴한 방안에 누워있다가 이윽고 소리를 질렀을 때. 분유와 기저귀와 어린이집과 영어 교육 사이에 위치를 정해야 할 때. 새벽에 한 시간마다 깨는 아가를 앞에 두고 “엄마” “엄마” 하고 울었을 때. “엄마 미워”와 “엄마 싫어” 사이 한 번의 “사랑해”에 온 얼굴로 웃을 때. 나는 평범한 ‘엄마’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궁금해진다. 매일이 같고 매 순간이 다른 하루들을 버텨가며 답을 찾는다.



엄마라는 상징은 왜 거부감이 드는가? 왜 엄마 되기에 저항하고 싶은/싶었는가? 엄마를 설명하는 단어는 숭고와 희생인가? 엄마는 왜 약자가 되는가? 어쩔 땐 강자가 되는가? 어떻게 혐오되는가? 어째서 혐오되는가? 질문들의 머리에 나를 넣었다가 너를 넣었다가 우리와 세계와 내일을 넣어본다. 설명되어지지 못했던 ‘엄마’들의 여정들 속에서 아마도 난 더 많은 나를 마주 보게 될 것이다. 여지없이 편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낮추었다가, 저항하고 일으켰다가, 달라지고 싶어 내달리다가, 힘이 빠져 숨어버리는 ‘나’들 모두를, 끝내는 끌어안게 되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충분히 내가 되는 ‘엄마’이길 바라고, 세계를 넓히는 동사가 되길 바란다.


너에게 뒤늦은 답을 해본다. 나는 여지고 싶어 ‘엄마 택했다. 실비아 플라츠가 자신의 죽음은 “경험의 단절이며 자신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여성에게 있어 자신의 신체가 겪고 품을  있는 위대한 경험이기에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삶을 허비하는 심각한 죽음이라고 말한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조리원에 던져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