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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정률 Jan 10. 2024

그 점사는 틀렸습니다

   은밀하게 통용되는 그들만의 마케팅 제스쳐가 있을지 모른다. 수산물 시장을 지날 때 들리는 “잘해드릴게요”라는 탁한 음색이라던가, 미스코리아가 굽히는 이유모를 각도의 인사하는 무릎이라던가. 신점을 본다는 이들이 허공을 보며 내뱉는 “저분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라는 물음이라던가.


   내게도 그 순간이 왔다. 천직을 알려준다는 점집이었다. 낡은 회색의 개량 한복을 입은 그는 마치 교본이라도 있는 듯 어깨 위 허공을 보며 말했다. ‘내 인생에 이런 문장을 직접 듣게 되다니!’라는 철없는 희열감에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인사의 클리셰에 비해서 점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가 천직을 알려주는 방식은 전생을 읽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나는 (무려!) 꽤 높은 위치의 신의 셋째 아들이었다. 게다가 조류의 별에서 정략결혼을 해서 보낸 매의 아들이었고, 서자였다. 장자 계승에 불만을 일으켜 전쟁을 일으켰고 죄많은 인간의 세계에 떨어져 죄를 갚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마음을 잘 쓰시고 윤회를 멈추시라며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미안하지만 이생망이다). 그는 열성적으로 그들의 세계를 종이에 그려냈지만 머릿속에는 이걸 우쭐해야하나 그 인생의 씁쓸함을 표현해야하나, 어떻게 하면 대화의 끝이 어색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 동안 몇 겹의 지배 체계가 있는 세계의 복잡함과 불의에 저항하고자 하는 나의 성미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래서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매의 아들은 어떤 직업으로 밥벌이를 해야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신선한 이야기꾼을 만날 수 있었지만 내 돈 10만원은 그날도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십대 언저리의 나는 “점보기”라는 취미생활로, 애써 모은 돈들을 잃고 다녔다. 돈 없이 사는 (혹은 돈 없이 살 수 밖에 없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만난 사주가는 사주의 여덟 글자를 돈으로만 읽었다. 초년에는 적당하다 중년에는 없어졌다가 말년에는 부자라던 그의 목에 유난히 두꺼운 금목걸이가 번쩍 거렸다. 한 사람과 11번 째 헤어지려던 날 타로카드를 뒤집던 리더는 벗어나지 못할 인연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최종_최종_진짜_최종_final’의 이별을 통보했다. 별자리의 위치로 특정한 차트를 읽는 점성술은 자기 스스로 숙제를 부여하고 태어난다고 말해 마음에 들었다. 내 숙제는 아빠와의 관계라고 했고, 감정을 표현하는 글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내게 남자복은 없어도 남편복은 있을 꺼라고 말했다. 결국 그날 우리의 대화는 그에게 마지막 사랑이 50 언저리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로 끝이 났다.

   나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가 덜 자란 나무가 되었다가 이윽고 도끼에 잘리기도 했다. 고집이 많은 성격이었다가 유연한 마음을 가졌다가 죄를 많이 지은 자였다가 의롭고 곧은 사람이 되기도 했다. 여자같은 남자도 되었다가 남자같은 여자도 되었다. 어떤 것들은 고개를 갸웃했고 동시에 다 맞기도 했다.


   그 시절엔 어떤 식으로든 정의할 수 있는 ‘나’에 대해 집착했다. 단서를 찾기도 했고 형용사를 구하기도 했다. 찾는 일에 맹목적이었지만 의심도 많았다. 내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타인에게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그랬던 탓인지 자주 으르렁거렸다. 겁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혼자서는 풀어낼 수 없었던 막연한 문답들이 지칠 때면 점을 보러갔다.

   나랑은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서 기계적으로 내뱉는 풀이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풍경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차라리 편안했다. 한편의 연극 같았다. 나라는 제목을 가진, 몇 개 되지 않은 문장에다 각주로 변주하는 연극.



   같은 사주, 같은 날짜, 같은 얼굴을 토대로 만들어진 모든 문장이 나를 설명할 수 있었다. 때로 몇 개의 문장들만이 가능했다. 잠시 진짜였고, 반복적으로 가짜였다. 그건 내 운명의 여덟자를 경유하여 각자 자신의 인생을 읽어주기 때문에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 인생에서 가장 날카롭고 보드라운 단어들을 가져왔으리라. 그렇게 반복적으로 타인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점을 보러 가지 않는다. 다년 간의 경험으로 업계의 패턴과 점성학의 특성상 할 수 있는 말이 예측 가능해졌다. 말하자면, 대충은 이미 다 들었던 말이다. 예전보다 궁금한 것도 없고, 흥미진진하게 다가올 격정적 이벤트도 줄었다. 회사의 재계약이라던가 날 피폐하게 했던 인물 A과의 관계처럼, 뚜렷한 사건이 없는 점보기는 보는 사람도 풀이해주는 사람도 흥이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점성술이라는 전제들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분석과 예측들은 내가 살아내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음달에 이직운이 들어와도 내가 이력서를 쓰지 않으면, 욕하면서 회사를 다니는 수 밖에 없다. 돈이 넘치는 중년의 운이라고 한들, 한없이 한량으로 살아갈 마음이라면 내 인생이 아니다. 외로운 사주라 해도 오롯한 인생의 벗 한둘은 있기도 하다. 할 수 있는 건 오늘의 나에게 “댓츠 오께이!!!”를 외치고 난 힘으로 내일을 맞는 것이고, 그래야만 운명 위에 놓일 수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님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는 “세상을 바꾸려는 투지로 불타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긍지와 존중감이 없다면 그건 ‘비슷하지만 가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 쓴다.


가장 중요한 건 보는 힘이다. 내 운명의 지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끈기와 열정이 필요하다. 보는 힘이 커질수록 자신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하다. 보는 힘이 커질수록 자신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접점이 넓어진다. 보통은 비참하게 주어진 운명을 억척스럽게 개척하는 것이 인생 역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건 어디까지나 진부한 성공담의 서사일 뿐이고, 진짜로 인생을 바꾸려면 가장 먼저 자신의 운명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역시나 어렵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이 깨끗한 마음에 “끈기와 열정”까지 더해져 만드는 쌓아 올리는 운명에 대한 존중은 얼마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을까. 사실은 얼마나 쓰리고 버거운 일일까. 시지프스가 들어올리는 것은 그래서 돌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진짜 운명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갖가지 지혜나 지식을 빌려와도 꼼수와 방법을 훔쳐와도 인생은 다른 이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겁많던 시절에 만난 값비싼 위안의 오답들만큼이나 몸으로 만든 오답들이 쌓여지고 나서야, 겨우 마주볼 용기가 생긴다. 미래형으로 말해지던 점사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나의 계획도 절반은 떠났고, 절반은 머물렀다. 나의 희망도 그랬고 절망도 그랬다. 오늘도 그러했든 내일도, 나는 주어진 운명의 뒷면을 겨우 채워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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