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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Mar 03. 2023

사람과 문장을 사랑하는 일

사랑의 형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문장을 사랑하는 일이다. 누군가는 하나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쉼표와 마침표를 사랑했을 것이다. 사랑의 형태, 나는 이것에 대해 자주 생각해 왔다. 나의 사랑에도 쉼표와 마침표가 있었으나 생각해보면 쉼표는 쉼표대로, 마침표는 마침표대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배려의 형태, 나는 유독 배려를 어려워했다. 쉼표와 마침표, 말줄임표를 번갈아 가며 사랑했고 또 배려했다. 배려가 결국 공백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말줄임표로 그 공백을 계속 채웠다. 내가 주었던 사랑과 배려에는 수많은 점들이 불규칙하게 존재했다.

 미팅이 잡혀있던 2월의 어느 수요일. KTX를 타고 대전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하늘의 암막이 막 걷힐 무렵,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의 출발 시각을 알리는 커다란 전광판을 지나 플랫폼으로 내려가자 길게 이어진 철길이 보였다. 양 옆 기둥 너머의 겨울 공기가 내 두 뺨을 은은하게 손지검했다. 입김은 나지 않는 다소 온화한 날씨였지만,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채 밤색 의자에 앉아 내가 타야 할 기차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끝나갈 무렵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찬 공기와 함께 사르륵 다가왔다. 열차에 오르고 지정 좌석에 앉자마자 등받이를 뒤로 조금 젖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서글서글 피어오르면서 주변 공기가 점차 환해지고 있었다. 기차는 인기척 없이 얌전하게 출발하더니 곧 냉정하리만큼 빠르게 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을 감으면 온 세상이 너무도 고요하고 가만해서 기차가 제대로 달리고 있는 건지 자꾸만 의아했다. 그러다 눈을 뜨면 깜짝 놀랄 만큼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으로 조금 불편하게 달렸다.

 대전에 도착해 미팅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근처를 돌아다녔다. 많은 원룸촌과 24시 코인 빨래방을 지나쳤다. 단조로운 풍경에 조금 지루해질 무렵 핸드폰 지도를 켜자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카페 겸 책방이 있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근처 골목을 나긋나긋 걷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책의 질서 정연함과 드립커피의 부드러움이 응축된 곳이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었다. 혹시나 하여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께 여쭈니 늦은 오후에나 입고될 거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나는 기차를 타고 있을 터였다. 멋쩍은 웃음 지으며 적잖이 아쉬워하고 있는데 그가 책장의 가장 낮고 외진 곳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실은 저도 이 책이 너무 좋았거든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읽었어요. 독서 모임에서 소개할까 싶어 밑줄을 많이 긋고 인덱스로 이곳저곳 표시도 해 두었는데, 괜찮으시면 자리에서 편하게 보세요.

 누군가의 흔적이 묻은 책을 읽는 건 오랜만이다. 새 책 보다 더 아끼고 조심해 가며 첫 장을 펼쳤다. 곳곳에 형광펜의 자취가 가득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이 머물렀던 문장들을 천천히, 느리게 읽어본다. 작가 본연의 서정적인 문체 너머 이름 모를 누군가의 따듯한 마음이 아메리카노처럼 진하게 다가온다. 나는 평소보다 더 오래 문장에 머문다. 단어와 마음의 무늬를 아주 천천히 밟으며 가고 있다.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문장일지라도 형광펜으로 표시되어 있으면 괜히 종이를 매만져 본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독서를 했던 것은 문장 이상의 마음을 쏙쏙 주워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 걷는 것도 같다. 그 아름다운 간격을 유지하며 느리게 걸었다.


 그렇게 200쪽 분량의 에세이 한 권을 다 읽었다. 떠나기 전 나는 그에게 쿠키 몇 조각을 건넸다. 미팅 자리에서 받은 갓 구운 쿠키 중 몇 개였다. 쿠키는 내가 품었던 아름다움의 한 형태였다. 내가 앉은 일 인분의 자리, 오래 머물 수 없는 아쉬움, 창문 너머 보았던 잎사귀의 떨림과 귀여운 소란. 쿠키를 건네고 되려 드립백을 받았다. 성숙한 마음을 갖고자 할 때 나는 이런 사랑의 형태에 대해 조금 더 자주 생각하기로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내내 마음에 석양이 오래 번졌다.

 최근에는 코코아 가루가 들어간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코코아 가루를 자칫 잘못 넣으면 치즈케이크가 아닌 초콜릿케이크가 되어 버리기에 양을 적절히 조절하기란 쉽지 않아서, 무릇 무릇한 식감의 바스크 치즈케이크와 코코아 가루가 잘 어울릴지 의아했다. 한입 베어 먹어 본다. 흑과 백, 낮과 밤, 감성과 이성처럼 그 둘은 서로를 등졌지만 이내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오르막길을 등산하는 일처럼, 그 둘은 서로의 마음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서로의 등을 빌렸을 것이다. 하나의 완전한 초코가 아닌 서로의 존재를 배려하고 이해하며 포근히 겹쳐진, 사랑과 아름다움의 한 형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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