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마 1세부터 10세까지, 군주의 위상과 왕실 자산의 변천
태국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국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도 단순한 국가원수가 아닌, 태국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를 관통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국왕을 말이다.
필자는 수년 전 태국 현지를 방문했을 때, 한 노인이 방콕 왕궁 앞에서 합장하며 “푸미폰은 나의 진정한 아버지였다”고 말하는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 노인의 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태국 국민 다수의 진심이었다.
이 글에서는 태국 차크리 왕조의 흐름과 함께, 라마 9세에서 라마 10세로 이어지는 국왕 위상의 변화,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왕실 자산과 기업 구조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차크리 왕조: 라마 1세부터 8세까지
1782년 라마 1세(푸타요트파 출랄록)가 방콕에 새 수도를 세운 이후, 태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기 전까지 왕 중심 사회를 이어왔다. 다음은 그 핵심 요약이다.
라마 1세 (재위 1782–1809)
방콕으로 수도를 옮기고 에메랄드 불상이 있는 왓 프라깨우를 건설했다.
문화적 정비와 법률 체계 구축의 기틀을 닦았다.
일화: 라마 1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탁신 왕을 도와 버마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이었다.
그의 군사적 재능과 충성심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라마 2세 (1809–1824)
문학과 예술 진흥에 힘써 태국 문화의 기반을 더욱 다졌다.
일화: 라마 2세는 시와 문학에 능했으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태국 문학이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는 직접 시를 쓰고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라마 3세 (1824–1851)
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하며 경제 기반을 강화했고, 왓 아룬(새벽사원)을 재건했다.
일화: 라마 3세는 상업에 능숙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그는 상업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사원을 재건하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라마 4세 (1851–1868)
외교와 과학에 밝았던 군주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
일화: 라마 4세는 즉위 전 27년간 승려로 생활하며 서양 과학과 언어를 공부했다.
그의 이러한 배경은 이후 태국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마 5세 (1868–1910)
태국 근대화의 아버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철도, 공공행정 등 서구식 국가 체계를 도입했다.
일화: 라마 5세는 어린 시절, 영국인 가정교사 안나 레오노웬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후에 뮤지컬 '왕과 나' 로 각색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라마 6세 (1910–1925)
교육과 문학을 진흥시키며 서구식 시민 교육을 장려했다.
일화: 라마 6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태국 최초의 정규 군대를 창설하고,
국가주의적 문학 작품을 다수 집필했다.
라마 7세 (1925–1935)
군부와 시민 세력의 압력으로 1932년 입헌군주제를 수용했다. 절대왕정 시대의 종언.
일화: 라마 7세는 입헌군주제를 수용한 후,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왕위를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라마 8세 (1935–1946)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왕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일화: 라마 8세는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라마 9세: '국민의 아버지'
라마 9세(푸미폰 아둔야뎃)는 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은 군주다. 70년에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국왕은 단순한 상징이 아닌, 국민의 삶 속에 실질적 영향을 미쳤다.
- 농촌 개발, 의료, 재난 복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실천적 활동을 주도했다.
- 정권 불안과 쿠데타의 반복 속에서도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며 사회적 균형자로서 신뢰를 얻었다.
- 불교적 신성성과 결합된 왕의 이미지 덕분에 그는 거의 반신적 존재로 숭배되었다.
- 태국 형법 112조(왕실 모독죄)는 그를 비판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했다.
일화: 라마 9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유일한 태국 국왕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4,000개 이상의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라마 10세: 신성에서 현실로
하지만 그의 아들, 라마 10세(마하 와치랄롱꼰)의 시대는 완전히 다르다.
- 즉위 이후 독일 체류, 사생활, 혼인 관계 등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 라마 10세는 왕실 자산청(CPB)을 자신의 직속으로 전환하며 왕실 자산에 대한 직접 통제권을 확보했다.
- 또한 방콕 인근 군부대를 자신의 휘하로 재편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 이 같은 행보는 청년 세대와 도심 시민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2020년에는 왕정 개혁 요구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일화: 라마 10세는 스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독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러한 생활 방식은 태국 국민들 사이에서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왕실 자산과 기업: ‘국왕은 재벌이다’
태국 국왕은 국가 예산 외에도 막대한 개인 자산과 왕실 자산을 운용하는 독특한 지위에 있다.
Crown Property Bureau (CPB)
- 과거에는 정부 산하 기구였으나, 2017년 법 개정으로 국왕 개인의 자산으로 전환됨.
- 자산 규모는 약 **370억594억 달러(한화 약 50조80조 원)**로 추정됨.
주요 기업 지분
- 시암 시멘트 그룹(SCG)
태국 최대 산업재벌로, CPB가 약 30% 지분 보유.
- 시암 상업은행(SCB)
태국 주요 은행 중 하나로, CPB가 약 21% 지분 보유.
방콕 중심부 부동산
- 왕실은 방콕 도심부의 핵심 부지를 대규모로 소유하고 있음.
Siam Paragon, CentralWorld, Four Seasons 호텔 부지 등
- 전체 부동산 규모는 13,200에이커(약 53.4㎢)에 이르며, 대부분이 임대 수익을 창출함.
결론: 태국 군주의 변화, 그 속의 사회
태국의 군주는 더 이상 절대적 신성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라마 9세 시절의 존경은 아직 사회 일부에 남아 있으나, 라마 10세 시기의 정치와 자본의 집중은 민주주의적 가치와 충돌하고 있다.
왕실에 대한 시선은 이제 세대와 계층에 따라 다르며, 정치적 상징에서 경제적 실체로 왕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려는 우리로서는 이 변화의 파동을 면밀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