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의 그림자와 민중의 분노
동남아시아의 화교 공동체는 수세기 동안 이주와 정착, 동화와 배제를 반복해왔다. 그중에서도 인도네시아의 화교사는 유난히 복잡하고, 때로는 잔혹한 궤적을 남겼다. 이 글은 인도네시아 현대사 속 화교 탄압의 구조적 배경과 결정적 사건들을 간략히 정리하고, 그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고자 한다.
제국의 전략: 화교를 중간계층으로 만든 네덜란드
17세기부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계층화된 통치 구조'를 설계했다. 핵심은 통치의 말단에서 세금과 질서를 책임질 수 있는 중간계층의 육성이었다.
화교는 상공업에 능하고, 이미 자바와 수마트라 등지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이들을 상세무인, 세금징수자, 하급 관료 등으로 활용하며 토착민과의 직접적 마찰을 피하고 통치 비용을 줄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는 구조적 불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화교는 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인식되었고, 토착민 사이에서는 "외부자이자 기득권층"이라는 이중적 반감이 싹텄다. 특히 1740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교 학살은, 경제적 불만과 인종적 편견이 결합해 얼마나 쉽게 폭력이 분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독립 이후의 적대: 공산주의와 중국의 그림자
1945년 독립 이후에도 화교는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이방인의 위치에 머물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적 부여를 둘러싸고 화교를 "인도네시아화"하려 했지만,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적 긴장, 냉전 속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공포가 화교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
특히 1965년 수하르토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 대규모 반공 숙청이 벌어졌고, 중국과의 연계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수많은 화교가 학살, 강제이주, 재산 몰수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중국식 이름 사용 금지, 중국어 학교 폐쇄, 문화행사 금지 등 동화 강요 정책이 법제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화교가 여전히 도매업과 수입업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정치적 차별과 경제적 필요라는 이중 구조가 고착되었다.
1998년 5월: 불타는 자카르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 경제를 무너뜨렸고, 다음 해 수하르토 정권은 위태로워졌다. 1998년 5월, 대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분노는 곧 화교 공동체를 향한 무차별 폭력으로 번졌다.
5월 13일, 자카르타 곳곳에서 조직적이고 계획된 듯한 약탈과 방화가 발생했다. 중국계가 운영하는 쇼핑몰, 식료품점, 가전매장들이 불타올랐고, 주택가에까지 폭도가 침입했다. 특히 끔찍한 것은, 화교 여성들에 대한 집단 성폭행 사건이었다.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군 병력이 폭도를 방관하거나 조장한 정황도 포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의 화교가 싱가포르, 호주 등지로 탈출했다. 수하르토는 사건 직후 사임했다. 그러나 화교에게는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전환점이 아니라,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충격적 메시지로 남았다.
변화와 남은 과제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는 중국어 교육을 허용하고, 화교 출신 정치인도 등장시키며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하지만 경제적 격차, 뿌리 깊은 편견, 사회적 거리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혹 전 자카르타 주지사의 사례에서 보듯, 화교가 정치적 위치에 설 때마다 정체성과 종교, 인종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른다.
마무리하며
인도네시아 화교의 역사는, 단순한 소수민족의 고난사가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가 남긴 사회구조적 유산과, 근대국가가 자국 내 다양성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다문화 사회의 과제 역시, 이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외부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약자의 도덕이 아니라, 성숙한 국가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