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유산: 미얀마

-미얀마 민족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by Yan

한 나라에 130개 이상의 민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우리는 종종 '다문화'나 '풍요로운 전통'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다채로움이 언제나 조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얀마, 이 동남아시아의 땅은 바로 그 모순의 상징 같은 곳이다. 다민족 사회가 어떻게 식민 지배와 권력의 논리 속에서 갈등의 장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천혜의 요충지, 필연의 모자이크

미얀마는 한반도의 3배 크기다. 북쪽은 히말라야 자락, 동쪽은 태국과 접한 산악지대, 서쪽은 인도, 그리고 남쪽은 안다만 해로 열린 내해. 이 복잡한 지형은 수천 년간 티베트-버마계, 몬-크메르계, 그리고 인도계 민족들이 이 땅으로 흘러들게 만든 통로였다.

가장 큰 민족은 버마족(Bamar).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며, 주로 이라와디 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에 자리잡았다. 그 외에도 샨족, 카렌족, 친족, 까친족, 몽족, 라카인족 등 수많은 소수민족이 산악과 국경 지역에 분산되어 살았고, 자연스레 언어와 종교, 생활 방식은 민족마다 달랐다.


영국이 설계한 민족 간의 선

19세기 후반, 미얀마는 3차례의 전쟁 끝에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그런데 이 식민 통치가 남긴 흔적은 단순히 ‘지배당한 역사’가 아니었다.

영국은 미얀마를 버마족 중심의 평야 지역과, 소수민족이 사는 산악 지역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

버마족 지역은 직접 통치하여 정치적으로 억눌렀고,

소수민족 지역은 간접 통치로 전통 수장을 통해 지배했다.

더 나아가, 영국군과 경찰 조직에는 카렌족, 친족, 까친족 같은 소수민족을 우선 채용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었다.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한 구조적 장치", 바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의 전형이다.

그리고 하나 더, 영국은 인도에서 다수의 무슬림 노동자와 상인들을 이주시켰다. 이들이 훗날 '로힝야족'이라 불리는 무슬림 공동체의 기반이 된다. 식민 통치는 끝났지만, 민족 간의 불신은 구조로 남았다.


독립은 시작이 아니었다, 또 다른 전쟁의 문이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한다. 그러나 그것은 갈등의 종결이 아니라 분쟁의 시작이었다.

독립 직후부터 샨, 카렌, 까친 등의 소수민족이 ‘연방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며 무장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대응한 버마족 중심의 중앙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고, 급기야 1962년 네윈 장군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다.

군부는 ‘버마화 정책(Burmanization)’을 추진한다.
소수민족의 언어, 문화, 종교까지 동화시키려는 시도는 다시금 무력 저항과 반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70년 넘게 미얀마에서는 내전이 멈추지 않았다.


로힝야, 잊혀지지 않는 상처

2017년,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단행한다. 수십만 명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했고, 유엔은 이를 ‘인종청소’라고 규정했다.

군부와 다수 버마족은 로힝야를 “식민 시절 유입된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며, 시민권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초는, 다름 아닌 영국 식민 지배의 이주 정책이었다.
과거는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현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분열의 기억을 넘어설 수 있을까?

2021년,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과거 서로 싸웠던 소수민족 무장 세력들과, 도시의 민주화 세력이 ‘공통의 적’인 군부에 맞서 연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십 년간 서로를 불신했던 민족들이,
이제는 함께 싸우고 있다.

그것이 일시적일지, 아니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의 씨앗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미얀마의 갈등은 단지 '민족 간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 유산과 권력 독점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

그 뿌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어떤 해결도 허상일 뿐이다.


미얀마 민족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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