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편에 걸쳐 동남아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니, 새삼 이 지역에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나 싶다. 나름의 인사이트를 담아보려 애썼지만, 독자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각 나라별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보태며 마무리하려 한다.
태국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다. 산악과 해안을 모두 가진 안정된 지형을 바탕으로 성장해왔지만, 진정한 의미의 도약에는 실패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해외 생산기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고, 태국은 그 최대 수혜국 중 하나였다. 직접 도자기 업체를 방문해보니, 거의 대부분이 일본 기술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일본은 핵심 기술은 절대 전수하지 않는다. 이는 태국이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세계의 공장이 되자, 태국의 위상은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다. 현 국왕 라마 10세는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군부 역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요인이 태국의 1인당 국민소득 7,200불 수준에서 정체되는 이유다. 인구는 줄고 있고, 일할 사람도 부족하다. 선진국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에너지와 열정이 없다. 국민들은 한국과 같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바라고 있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는 있으나, 법적 구조적 체제의 한계에 부딧히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베트남
베트남은 다르다. 역동적이고, 우리와 유사한 성향을 지닌 민족이다. 1,000년간 중국의 지배, 약 80년간 프랑스 식민지배를 겪으며, 외세 지배에 대한 반감과 자립 의식이 깊게 뿌리내렸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 오랜 공산당 통치 아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조직보다는 개인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는 분명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동남아에서 가장 많은 FDI(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하며 고성장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 성장에도 한계가 올 것이다.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들은 매우 똑똑하고 부지런하다. 동남아 어느 민족보다 강한 실행력을 갖고 있어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일본처럼 이들과의 관계에서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얕보아서는 안되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22,0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다. 아직까지 하나의 통일된 국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섬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인구가 2억 8천만 명에 달해 내수시장이 풍부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법규는 까다롭고, 정부는 부패되어 있다. 그 와중에 화교들은 인도네시아어를 쓰며 현지에 동화된 듯 보이지만, 결국은 화교다. 이들은 끈끈한 유대를 유지하며 자신들끼리의 네트워크 안에서 움직인다. 이곳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결국 화교들과의 관계가 핵심이다.
일부 제조업이 존재하지만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신선식품과 가공식품 분야는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현대차가 공장을 세우고 있지만, 실제 생산성이 올라올지는 의문이다. 노동법상 사업장 내 사원을 지어야 하고, 하루 다섯 번의 기도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심지어 현지 화교조차 이를 불편해한다. 이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생산성을 올릴지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의 내수는 약 3,500만 명 수준이다. 기업들도 대부분 영세하고 규모가 작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1만 2천 불로, 일정 수준의 수요는 분명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슬람 금융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동남아 이슬람 금융시장의 약 80%, 즉 6,820억 달러를 차지하고 있으며, 상장 주식 중 샤리아(이슬람 율법) 기준을 만족하는 비중이 81%에 달한다. 또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 이슬람 채권(수쿠크) 시장의 42%를 점유하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중동의 부유층들은 이곳에서 돈을 풀고, 이곳에서 쉰다고들 한다. 이런 배경을 고려할 때, 할랄 인증 식품을 중심으로 고급 시장을 노리는 전략은 매우 유효해 보인다.
동남아시아는 분명 21세기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아세안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통합된다면, 미국이나 유럽에 못지않은 경제 블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될 것인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각 나라는 전혀 다른 역사, 문화, 언어,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가까워도, 실상은 너무나도 다르다. 매번 현지를 방문할 때마다 느낀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지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미중 간의 관세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이들 나라가 진정 의존해야 할 대상은 미국도, 중국도 아닌 ‘서로’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들이 스스로의 시장을 발견하고 통합할 때, 비로소 자립의 길이 열릴 것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적는 것일까? 그것도 30편의 주제를 가지고. 지난 7년간의 주재원 생활을 정리하고 싶어서가 가장 그럴듯한 대답이 아닐까. 이 글들이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길 바랬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의 글의 힘이 이 정도 밖에 안되리라. 사랑하는 동남아의 모습이 내 앞을 가린다. 다시 갈 수 있을까. 펀자브 지방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인도인들, 베트남에서 같이 조깅하던 사람들, 송클라에서 강을 바라보며 먹었던 맛있는 해산물, 비행기 3번을 갈아 타고 갔던 인도네시아 테르나테의 바다 새우양식장, 가격 협상과 공장 점검을 했던 수많은 공장들이 눈에 아른 거린다. 다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