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삶이라는 환상

-성장의 시대가 끝난 후,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by Yan

어릴 적, 부모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면, 그 다음엔 안정된 삶이 기다릴 거야.”

우리 세대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컸다. ‘안정된 삶’은 인생의 정답처럼 여겨졌고, 그 정답을 향해 수십 년을 달려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끝에서 묻고 있다.

‘안정된 삶’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성장의 끝에서 마주한 현실

우리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1990년대, 한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5~7%에 달했다. 이른바 압축 성장기의 마지막 황금기였다. 그때의 직장은 곧 성장의 열차였고, 열차에만 오르면 자연스레 안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2024년 한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1%대, 향후 수년 내 제로(0%) 성장 또는 역성장이 예측된다.
고령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내수 정체, 외부 리스크 증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장의 시대’가 아니라 '결핍의 시대'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성장이 멈춘 시대에 ‘안정된 삶’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한가?


한국인이 말하는 안정의 조건

‘안정’은 대체로 다음의 조합으로 설명될 것 같다.

대기업 혹은 공무원과 같은 정규직

아파트 소유

배우자와 자녀

퇴직연금과 국민연금

무이자에 가까운 빚 없는 생활

이 모든 것이 과거 성장 시대의 기대치에서 형성된 안정의 프레임이다.
하지만 지금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은 점점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30대 중반 직장인의 실질 소득은 정체된 반면,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10년간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정규직의 자리는 줄어들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10곳 중 7곳은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신규채용을 꺼린다. ‘안정’의 문은 닫히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안정이라는 단어의 착시

‘안정’이라는 단어 속에는 변화 없음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인생의 본질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심지어 경제조차도 그 사실을 인정한다.

"모든 경제는 순환한다"는 명제 아래, 성장과 침체는 반복된다.

기술과 인구 구조, 정치와 지정학은 끊임없이 판을 흔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성장 패턴을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하려 한다.
결국 ‘안정’은 현실이라기 보다, 안정을 믿고 싶어하는 인간 심리의 산물, 즉 환상일 수 있다.


타인의 기준을 내 삶의 기준으로 착각할 때

안정된 삶을 꿈꾸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이 만들어준 틀 안에서의 안정이라면, 그건 진정한 삶이 아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며, 개인은 불확실성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청년들은 일정 소득만 확보되면, 시간과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한국에서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만 안정이 정의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불안을 없애기 위한 ‘안정 추구’는, 역설적으로 더 큰 불안을 만들어낸다.


안정이 아니라 회복 탄력성이 필요한 시대

이제는 다른 가치가 필요하다.

한 직장이 아니라 여러 직업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함

부동산 소유가 아니라 현금 흐름을 조절하는 능력

예측이 아니라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는 민감성

이것은 더 이상 '플랜B'가 아니라, ‘뉴노멀(New Normal)’이다.


안정은 목적이 아니라 태도다

우리는 ‘안정된 삶’이라는 목표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도달 가능한 상태(state)가 아니라,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내는 태도(attitude)라는 걸 인정해야 할 때다.

성장 없는 시대에는, 안정이란 변화 속에서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힘이다.
그 힘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단련해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묻자.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오늘, 나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라고. (나에게 자꾸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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