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며
오늘 아내와 함께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아내는 한 줄 평을 남겼다.
“역시 박찬욱의 영화는 쉽게 볼 수가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 감독은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걸까?’
마지막 장면이 유난히 선명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공장.
기계가 돌아가고, 인간은 오직 이병헌 한 사람뿐이다.
기계는 그를 피해 다니고, 모든 검사는 이미 완벽히 끝나 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망치를 두드린다.
불필요한 몸짓, 그러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
이병헌의 인물은 영화 초반,
면접관에게 “다른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그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후 살인을 저지른 뒤, 그의 생각은 완전히 변한다.
더 이상 자신과 함께할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제 ‘동료’란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되어버린다.
그 장면에서 나는 문득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를 떠올렸다.
기계의 톱니바퀴 속에서 인간이 말려 들어가던 그 시대의 풍경.
당시 사람들은 공장을 ‘기계의 괴물’이라 불렀고,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톱니로 바꾸어야 했다.
그 시절에는 실제로 기계파괴운동(Luddite Movement) 도 있었다.
“기계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두려움 속에서
인간은 망치를 들어 기계를 부쉈다.
그로부터 약 백 년.
이제 박찬욱의 시대는 AI 시대 다.
기계는 더 이상 공장에만 있지 않다.
스마트폰 속, 알고리즘 속, 심지어 인간의 감정과 언어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그것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한다.
그저 공존의 이름으로, 기계의 질서 속에서 자리를 내어준다.
채플린의 인간은 여전히 저항할 힘이 있었다.
그는 웃으며 기계를 조롱하고, 공장을 뛰쳐나가 사랑을 찾았다.
그러나 박찬욱의 인간은 이미 기계 속에 내재된 존재 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기계의 리듬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망치를 두드린다.
채플린이 묘사한 산업혁명은
“기계가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던 시대”였다면,
박찬욱이 그린 AI 시대는
“기계가 인간의 정신을 흡수하는 시대”다.
<모던 타임즈>가 웃음으로 기계를 비웃던 시절,
인간은 아직 낭만을 잃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다>의 시대에는,
낭만 대신 자기 인식의 냉기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헌은 망치를 든다.
그 두드림은 이제 저항이 아니라
“나 아직 여기 있다”는 존재의 선언이다.
아내의 말처럼, 박찬욱의 영화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는
이 시대의 인간이 맞닥뜨린 ‘기계 이후의 고독’ 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