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지만, 어디로

- 사라지고 싶은 날에 대하여

by Yan

사라지고 싶은 날

가끔은 모든 게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회의실에서 날아오는 무심한 말들,
끝도 없이 울리는 메시지 알림,
눈치로 얼룩진 식사 자리.

그런 날엔 일찍 퇴근해도 마음은 한참 뒤에 도착하고,
잠들기 전까지도 머릿속은 멈추지 않는다.
문득 든 생각.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마음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데 지쳐서 생긴다.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이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책임으로 바뀔 때,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심보다 계산으로만 이어질 때,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만 시간을 빼앗길 때.

‘도망치고 싶다’는 말 속에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절박함이 들어 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선, 삶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도망의 대상은 현실일까, 나 자신일까

우리는 종종 현실을 탓한다.
회사, 상사, 가정, 시스템, 사회.
하지만 잠시 멈춰서 물어보면
정작 도망치고 싶은 건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무력해진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일이 싫은 게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견디기 어려운 것.
관계가 괴로운 게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점점 지워져 가는 나를 더 이상 보기 싫은 것.


탈출구는 밖에 있을까, 안에 있을까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다.
모든 걸 뒤로한 채, 비행기 티켓 하나에 기대어
이 낯선 곳 어딘가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낯선 거리는 새롭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낡은 고민을 품고 따라왔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탈출구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균형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
다시 나를 다잡을 수 있는 고요함.


잠시 멈추는 것도 도망의 한 방식이다

도망이라는 단어엔 죄책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꼭 어딘가로 ‘달아나야만’ 도망은 아니다.

잠시 멈추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신을 위한 단절을 허락하는 것.
그것도 충분히 건강한 도망의 방식이다.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는 세상에서,
멈출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한 걸음

도망치는 마음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원한다는 증거다.
때론 그 마음이 방향을 바꾸고,
길을 찾아가는 나침반이 되어준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내가 괜찮아지는 방향으로 한 걸음만 내딛어도.
그게 진짜 ‘도망’이 아닌
회복으로 가는 여정일지도 모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말보다 존재가 필요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