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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May 03.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ㄱ

가사

1.


  "참으려 해봤지만 이젠 안되겠어요" 또 시작이다. 얘는 무슨 노래를 불러도 가사가 다르네. 아니, 오히려 창의적인 인간일까? 됐다. 그냥 두자. 한 단어가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잔소리를 꿀꺽 삼키며 계기판에 집중하자 곧바로 귀에 결정타가 꽂힌다. "사랑하고 있어요 그댈" 아, 이건 아니지 친구야.


"아니, 이젠이 아니라 더는. 있어요가 아니라 싶어요지. 부르는 노래마다 틀리는 그것도 재능이다!" 운전자의 핀잔에 또 시작이라는 눈빛의 조수석 승차자. 이윽고 "아니, 대~충 뜻만 맞으면 됐지. 노래는 음 때문에 듣는 거 아니가?" 라며 당차게 응수한다. 운전자는 입밖에 꺼낸 잔소리를 후회하다, 결국 "그건 맞지!"라며 유쾌하게 대화를 끝낸다.


동시에 속으로 굳게 다짐한다. '도착할 때까지 임마가 모르는 노래만 틀어야지.' 노랫말 수호자의 조용한 복수에 목적지로 가는 남은 시간은 검정치마의 콘서트였다. 다만 관객의 반응은 새벽 3시의 주택가처럼 고요하기만 했다더라.




2.


  '잘 쓴 가사'는 한 편의 문학이다. 표현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단어 하나도 낭비하지 않는다. 당장 위의 이야기에 등장한 DAY6의 <좋아합니다>라는 곡만 하더라도 그렇다. 조심스레 뜯어보자.


나의 절친한 창의력 대장이 개사한 부분은 두 가지다. 먼저, '못 참는다'라는 표현을 앞에서 꾸미는 상황. 이 경우 '이젠'이라는 표현은 시간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풀어보자면 '내가 지금까진 참았는데, 이제부터는 안 되겠어'와 같은 느낌이다. 충분히 절절한 표현이지만, 원전의 단어가 더욱 애절하다.


'더는'이란 표현은 상대를 마음에 품은 시간을 포함해 '감정의 양(量, Quantity)적인 면'이 모두 담기는 그릇이다. '이젠'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노래의 서사인 '말할 수 없지만 그 인내심과 기다림이 한계에 봉착한 짝사랑'의 감정을 어떤 단어보다도 잘 나타낸다.


'싶어요' 또한 같은 맥락이다. 앨범 전반에 깔린 수동적인 스탠스와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가 녹아 있는 이 맺는 표현은 '있어요'와 달리 곡 전반의 감정을 가장 뚜렷하게 반영하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다.


작사가가 아니라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내가 듣기엔 그렇다.


3.


  맞다. 당신이 생각하듯 나는 흔히 말하는 '가사충'이다. 물론 내세울 게 멜로디뿐인 노래가 천박하다거나 듣기 싫다는 건 아니다. 다만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들을 그렇지 않은 노래보다 훨씬 오래 듣는 편인 것은 확실하다.


개인적으로 비유하자면, 멜로디만 좋은 곡은 나에게 있어서 떡볶이다. 맵고 짜고 달고, 들어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직관적이고 폭력적으로 맛있다. 그러다 보니 매일 매 끼니 먹다가 보면 쉬이 물린다. 소스나 재료를 바꿔보아도 결과는 똑같다. 그렇게 한 번 신물이 난 떡볶이를 다시금 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


반면 가사가 좋은 곡은 백반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양념은 없지만, 쓰인 재료의 가짓수가 많고 매일 먹어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평생, 매 끼니 연달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 꼭꼭 씹어 먹을수록 그 맛이 극대화된다. 떡볶이엔 없는 수수하고도 깊은 맛이다.



4.


  시인 박준은 최근 한 서평에서 "덕분에 삶은 문장 같고 세상은 그림 같습니다."라고 썼다. 이 표현을 보고 떠오른 비유 하나 더. 가사가 좋은 노래는 잘 쓴 문학과 같고, 멜로디가 좋은 노래는 보기 좋은 그림과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그림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눈에 담는다. 그 후 질감이나 색감, 주제나 기법을 뜯어보게 된다. 심지어 멀리서 봤을 때 흥미가 솟지 않는다면 위의 부가적인 탐구는 생략될 때도 있다. 마치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곡을 도입부만 듣고 넘기는 것과 같다. 다음에 또 그 노래를 만나더라도 사용된 악기나 음은 물론 가사 한 줄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문학은 다르다. 녹아있는 세세한 표현이나 서사를 먼저 느끼고, 그것들이 모여 전체적인 한 편에 대한 인상을 만든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전체가 보이는데, 이는 가사가 좋은 곡에 빠지는 메커니즘과 흡사하다. 귀로 듣다가 눈으로 찾아보게 되고, 첫 단어부터 마지막 어미까지 머리로 외우게 되는 그런 곡들을 만났을 때다. 그 순간 우리는 가사가 아닌 문학을 읽는 독자에 가까워진다.



5.


  그래서 내 플레이리스트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인디밴드의 음악들로 가득하다. 그 특유의 마이너함에서 나오는, 섬세하게 꾹 눌러놓은 감수성들을 깊게 사랑한다. 아니, 오히려 마이너 하기에 누구보다도 진솔하고 유려하게 써 내렸을 가사는 그들만의 시집이자,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오디오 북이다.


그래서 혼자만 듣기가 자못 아쉽다. 귀가 즐겁고 단순한 노랫말의 소위 'TOP 100' 음악들도 좋지만, 기회가 된다면 당신도 꼭 인디씬의 '듣는 시'들을 만나보았으면 좋겠다. 크게 마이너 하지 않아도 괜찮다.


당장 당신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밴드들도 이미 예술가다. 검정치마나 혁오, 잔나비만 하더라도 나에겐 등단 작가이며, 그네들의 앨범은 문학전집과도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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