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멈춰 선 시간의 경계에서 -
제1화. 멈춰 선 시간의 경계에서
동탄역 3번 출구. 사람들은 모두 빠른 속도로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걸음은 단호했고, 망설임이 없었으며, 마치 자신들의 도착지가 정해져 있다는 듯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그들 사이에, 재훈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발소리는 지난 25년간 그가 달려온 시간의 잔해처럼 느껴졌다. 52세. 25년간 몸 바쳐 일했던 제조업체에서 그는 '구조조정'이라는 무심한 단어와 함께 밖으로 밀려났다. 그 단어는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가 마모되어 쓸모없어졌을 때 내뱉는 차가운 소리 같았다.
흐린 겨울이었다. 하늘은 젖은 콘크리트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그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전철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마다 일으키는 바람이 그의 낡은 코트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 차가운 기류 속에서 재훈은 문득 자신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난 존재’ 임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시간대'처럼 느껴졌다.
그는 무기력하게 계단을 내려와 출구 광장으로 들어섰다. 주변은 첨단 유리 건물들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그 속에 그의 모습은 낡은 사진처럼 초라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낡은 간판 하나가 들어왔다.
'정희 다방'
주변의 세련된 프랜차이즈 카페들 사이에서, 이 '다방'이라는 단어는 마치 오래된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유물 같았다. 추위를 피하려는 본능과, 저 낯선 시간의 간극에 대한 호기심이 그를 문으로 이끌었다. 그는 셔츠 주머니에 든 마지막 면접 결과를 떠올렸다. 역시나, '경험은 훌륭하나, 트렌드와 맞지 않는다'는 공손한 거절이었다.
문을 열자, 안에서는 따뜻한 공기와 커피 향,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정(情)'의 온기가 느껴졌다. 카운터 안에서 고운 인상의 사장, 정희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대단한 추론 없이도 재훈의 마음 깊은 곳을 읽어내는 듯했다.
“따뜻한 거 드릴까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재훈은 왜인지 모르게 가슴속이 살짝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때, 오른쪽 테이블에서 날카로운 대화 조각이 그의 귓가에 박혔다.
“AI 모델 업데이트가 오류 나면 다음 주 데모 못 해요. 그럼 우리 프로젝트는 끝장이야.”
청년 몇 명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열정이 뒤섞여 있었다. 'AI', '프로젝트', '끝장'. 알 수 없는 단어들과 함께 '미래'의 단면이 재훈에게 강렬하게 충돌했다. 그는 마치 오래된 시계공이 처음 보는 디지털시계를 마주한 듯, 낯설지만 묘하게 끌리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청년들 중 한 명, 단발머리의 여성이 강렬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재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토론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재훈에게 묘한 호기심을 남겼다.
재훈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차가운 몸이 녹아들수록, 마음 깊은 곳의 상실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때, 테이블에 앉아있던 청년들이 갑자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현장 다시 가봐야 해.”
재훈은 그들의 움직임을 무심코 지켜봤다. 그들이 떠나자, 정희 사장이 재훈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저렇게 살아요. 쫓기듯이.”
재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 때도 그랬죠. 다만 쫓는 게 돈이 아니라… 뭔지 모르겠습니다.”
정희 사장은 그의 커피잔을 내려다보더니 나지막이 읊조렸다.
“쫓는 게 '시간'인지, 쫓기는 게 '선택'인지… 늘 헷갈리죠.”
그 말이 묘하게 재훈의 마음을 건드렸다. 쫓겨난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기는 한 걸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문득 청년들이 앉았던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공장 배치도면'을 발견했다.
이해담 (Elias Th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