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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와인과 공감 언어

한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뉘어 다툴까?

by 지준호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선셋 거리 양편에 Beauty Supply 상점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들 주위로 이태리식당, 제과점, 치과, 은행, 식품점들이 어울려 있다. 이에 들락거리는 손님들이 동쪽의 Salon Beauty Supply와 서쪽의 Sally Beauty Supply를 번갈아 보고는 호기심을 품는다. 원수일까? 친구일까? 더러는 서로 노려보고 있다 하고, 더러는 쌍둥이 형제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공교롭게도 두 상점의 주인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숙녀들이었고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비록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 온 사이는 아니었지만 '동병상련을 느껴서일까? 경쟁의 스트레스에서 자유해지고 싶어서일까? 같은 교회 교인이라는 의무감 때문일까?' 서로 살갑고 예의 바르게 대했다.

이런 그들을 화사하게 피는 봄꽃을 시샘하듯 난분분하는 눈발처럼 고객들이 가슴 시리게 하는 말로 이간질했다. "건넛집은 10불인데 너네는 왜 12불이냐, 저쪽 집은 리턴도 잘 받아 주는데 너네는 이렇게 까다롭게 하느냐, 쟤들은 있는데 너네는 왜 없느냐" 라면서. 물론, 둘은 이기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오물이라 여기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하지만 서운함과 의심과 질투에서 태어난 미움이 빈집에 쌓이는 먼지처럼 가슴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였다.

Salon 주인인 쎄라가 Sally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애교스럽게 말했다.

"엔젤라, 다음 주말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대형 Beauty Supply쇼가 있는데, 갈 거야?"

언제나 주일을 끼고 열리는 쇼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엔젤라는 짜증이 났다. 하지만 태연한 목소리로 "그래?"라고 다정하게 답했다.

"토요일 새벽에 출발해서 주일 저녁에 돌아오려고 해, 같이 갈 거지? 비 온 끝이라 야생화들이 길가게 흐드러지게 피었고, 빅베어 산봉우리는 흰 눈으로 덮여 드라이브 길이 장관일 거야." 쎄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기회인데,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할 일이 있어서... " 엔젤라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겨우내 내 쌓여 찌든 먼지 툭툭 털어버리고 오자. 화사하게 차려입고 상큼한 봄 향기를 가득 품고와 고객들에게 풍겨 줘야지." 쎄라가 경쾌하게 말했다.

"전화할게, 손님이 있어서." 악의 소굴에서 도망쳐 나오듯 엔젤라가 핑계 대고 전화를 끊었다.

엔젤라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심사는 꽈배기 꼬이듯 뒤틀렸다. 'Salon 때문에 특별 수당까지 직원에게 지불하며 주일에 가게 문을 여는데, 쇼까지 가자고?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 일 줄이야....' ㅈㅈㅈㅈ 혀를 차다 세라가 신앙이 성숙해 주일에 문을 닫자고 할 날을 기대하며 화와 미움을 삭였다.

이틀이 지나고 엔젤라 핸드폰에 벨이 울렸다. 쎄라였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했어? 난 직원에게 부탁했더니 기꺼이 즐기고 오라네. 갈색이었던 산과 들이 며칠 전에 온 비로 그린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며. 오픈카를 타고 가려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후리웨이를 금발머리 휘날리며 달리면 고객들을 싱싱한 그린으로, 아름다운 분홍으로, 꿈에 부푼 파랑으로 만들 아이디어가 샘솟을 것만 같아."

‘애는 언제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 생각해’라고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엔젤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난 갈 수 없을 것 같아. 가게는 직원이 맡아서 하지만 주일학교의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일이라.... 운전 조심하고 잘 다녀와. 좋은 정보 얻어와 나누어 줘"라고 부모가 자녀에게 타이르듯 점잖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 엔젤라는 봄이 궁금했다. 문을 활짝 열었다. 감미로운 봄바람이 깃털처럼 부드럽게 얼굴을 간질었다. 가로수도 자색꽃을 한껏 피우고 있었다. 옆집의 목련도 환하게 피었다. 언덕의 하얀 배꽃들도 흐드러지게 피고는 벌써 연두색 잎들까지 덩달아 매달고 생명의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만발한 봄꽃들을 난 왜 느끼질 못했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픈카를 타고 후리웨이를 달릴 쎄라가 부러워졌다. 순간 세라가 탄 자동차가 전복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엔젤라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히다 우울해졌다.

쎄라는 상쾌한 새벽 봄 공기를 마시며 라스베이거스를 향해 15번 후리웨이를 달렸다. 웬일인지 무거운 마음이 떨쳐지지를 않는다. '엔젤라는 왜, 항상 우수에 젖어 있는 것일까? 착하고 순수하여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고 싶은데 내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시시콜콜 수다 떨며 비즈니스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으로 상품 구입을 하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데....' 틀에 박힌 무겁고 숨 막힐 듯한 대화만 하는 이유가 무얼까? 밝음도 없다. '하나님이 주는 자유와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과 일상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얼까? 하나님이 주는 생기는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그녀에게 경건과 거룩은 무슨 의미일까? 손님들에게 하는 서비스는 신앙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비즈니스와 고객은 무얼까? 오로지 생존을 위한 도구인 것일까?'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을 크게 틀었다. 맑고 힘차게 리드하는 트럼펫이 자신에게 오버랩되었다. 바이올린, 비욜라, 첼로, 플루트, 호른, 팀파니가 트럼펫을 협주하듯 봄을 맞은 생명들 모두가 자신을 위해 연출된 것 같았다. 동쪽에서 붉은 태양이 기쁜 소식을 계시하듯 떠오르고 있었다. 쎄라의 영혼이 팔닥거렸다. 용기가 솟았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을 애무하는 연인의 입술처럼 감미로웠다. 노랗게 군집을 이뤄 피어있던 야생화가 어느새 빨강으로 바뀌었다. 쎄라는 자신의 몸에 정열의 기운이 퍼지는 듯했다. 길가의 꽃들은 다시 분홍으로 옷을 갈아입고 그녀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곤 노랑 빨강 분홍 보라가 어우러진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그녀를 감탄케 했다.

어느새 오픈카는 라스베이거스에 들어섰다. 즐비한 카지노와 호텔들을 지나며 그녀는 호흡이 빨라졌다. MGM 호텔이 보였다. 까만 Magic Hat에 빨간색 재킷 입은 수위 아저씨가 허리를 구부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쎄라는 유명인사라도 된 듯 자동차 키를 그에게 우아하게 맡기고 목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똑, 똑, 똑' 스탭 댄스 같은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호텔로 들어섰다. 새하얀 블라우스 위에 까만 재킷을 걸친 모델 같은 직원들이 반기는 밝은 미소에 쎄라는 마음이 하늘처럼 높고 넓어지는 듯했다. 라운지에는 각종 Beauty Supply 부스에 화사한 봄 상품들이 빛의 직선으로 디자인된 진열장에 우아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데스크에서 키 카드를 받아 든 쎄라는 엘리베이타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하얀 씨트로 덮인 침대가 영혼을 맑고 밝고 순결하게 했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순결한 감촉과 자유를 누렸다. 창문을 열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함께 그녀를 유혹하는 갖가지 조형물들이 널려있었다. 쇼 룸으로 서둘러 내려온 엔젤라는 이미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은 듯했다. 시대를 앞서는, 씸플 하지만 고상하고 과감하고 개성 있는 상품들의 주인 된 것 같았다. 한 손엔 레드 와인을 들고 후로리다, 켄터키, 뉴욕, 달라스, 엘에이 등에서 온 이들과 환담을 나누며 그녀는 이미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돌아온 쎄라는 이태리 식당에서 엔젤라를 만났다. 웨이트리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료수는 무엇으로 할까요?"

"레드 와인으로 할게요" 쎄라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엔젤라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콜라" 했다. 그리고 메뉴북을 뒤척거렸다. 잠시 후 음료수를 들고 온 웨이트리스에게 쎄라는 연어 구이를 시키고 엘젤라는 파스타를 주문했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 시대를 앞서가는 내가 되어 돌아온 기분이야. 직선으로 디자인된 유리 진열장 위에 야성미 넘치는 봄 상품을 배치해 고객들이 봄의 생기와 함께 첨단을 맛보게 하려고."

엔젤라는 파스타 맛을 보고는 통 생강을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맛이 왜 이래."

쎄라는 놀라 엔젤라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웨이트리스에게 이야기할게."

"아니야, 그냥 먹을게." 엔젤라가 너그러운 척 말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그래야 다음 손님들에게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 아니야?"

"나로 인해 종업원들을 고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아."

"괜찮겠어?" 엔젤라를 조심스레 살피며 쎄라가 말했다.

고개를 끄떡이는 엔젤라를 본 쎄라는 어색함을 털어버리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쇼 이야기를 꺼냈다.

"강사가 '인간의 내면에는 서로 공감하는 언어가 있다'며 강의를 시작했어. 모두 귀가 쫑긋해졌지. '그 공감의 언어는 감각과 도덕과 정의와 진리의 기초 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거야. 비 온 뒤 숲 속을 거닐며 산소를 마시는 것 같았어. 그 공감의 언어에 따라 경영되는 비즈니스는 고객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직원들도 하나가 돼 번성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순간, 내 머릿속에선 그 이론이 곁가지를 치는 거 있지. '공감의 언어가 피어오르도록 돕는 것이 맑은 영혼이 되는 것이고, 빛 안에 있는 신앙'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강사와 하나님과 내가 함께 레드 와인을 마시며 소통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귀를 쫑긋하고 듣던 엔젤라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쎄라는 레드 와인 한 모금을 입 속에서 오물거리다 꿀꺽 삼키곤 이야기를 이었다.

"강사의 다음 이야기는 입 안에서 '톡' 터진 맑고 투명한 주황색 석류처럼 달콤했어. '봄이 오기 전엔 연두색 잎사귀, 여름이 오기 전엔 빨간 장미꽃, 가을이 오기 전엔 노란 단풍잎, 겨울이 오기 전엔 하얀 눈을 그리워하는 공감의 감각이 있다는 거야. 맞잖아! 이 감각을 손님들이 느끼게 해야 한다는 거야. 사실, 이 마음이 사랑의 기초이고, 진리에서 나오는 지혜 아니야? 난 무릎을 탁 쳤어. 공감의 감각과 언어를 듣고 말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신앙생활을 해야겠다는.... 믿기지 않는 것을 믿으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려다 오히려 생기를 잃고 사는 우리를 이 공감의 언어와 감각을 누리게 하려고 예수님이 와인을 들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우리의 죄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공감언어 따위로 전락시켜 와인 마시기를 합리화해 버리는 쎄라를 보며 엔젤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리는 것 같았다. 쎄라는 이야기를 이었다.

"사실 난 네가 알고 있듯이 날라리 신앙인이야. 그런데 이번 여행이 신앙의 생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어. 그동안 숨 막힐 듯 답답함을 교회 안에서 느끼고 있었거든.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도 내어 놓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을 읽으며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니 외식하는 자들이 되지’라고 생각을 했거든. 정직하고 순수하게 살면,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한 거짓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 사실 아니야?"

엔젤라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쎄라는 와인 한 모금을 오물거리다 꿀꺽 삼키고 무거운 짐을 벗은 듯 가볍고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까, 궁금했었어. 그냥 용서해 주면 될 것을, 왜?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그럴까?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정상인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바보든지, 미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지 않고선."

엔젤라의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을 보며 쎄라가 더욱 용기를 내었다.

"하지만 강의를 듣는 중 십자가 사건 속에 있는 두 개의 공감 언어를 발견한 거야. 하나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간은교만, 거짓, 이기심, 욕심, 무지함 속에서 처참하게 상처받다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죽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게 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제물로 삼은 것이야. 악을 선으로 갚은 것이지. 아니, 사랑으로 갚은 것이지. 그런데 그곳에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는 거 있지. 죄의 노예가 되어 기죽고, 꿈도 품지 못하고 살던 인간들, 말초신경만 자극하며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 힘 있는 자들에게 아부하며 노예처럼 지질하게 살던 인간들이 자유한 영혼이 되는 것이야. 얼마나 신나는 일이야, 기적 아니야? 이들이 생존의 욕망과 욕심과 이기심을 다스릴 능력도 얻게 된 거지. 그렇게 맑은 영혼이 된 존재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격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어울리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치를 높이며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악을 지고의 선으로 탈바꿈시켜 버린 십자가, 죽은 자가 부활해 생명을 얻게 하고, 성충이 예쁜 고추잠자리가 된 것처럼, 알에서 병아리가 나온 것처럼 말이야."

동그래진 엔젤라의 눈을 보며 쎄라가 말을 이었다.

"난 그동안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려 했어. 감정만 뜨겁게 하여 스스로 세뇌 되려 외치고 부르짖었어. 그러다 경건하고 거룩한 말과 행동으로 외식적인 인간이 되어 신앙의 교만에 빠지기도 했어. 갈등이 되었지. 하지만 율법주의를 확장시키고, 신비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오히려 막히게 하고, 노예와 거지 근성만 커진 사람들을 등 처먹는 도둑놈들의 소굴이 된 교회가 보였어." 엔젤라는 쎄라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식사를 마친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엔젤라는 삶의 버팀목으로 삼고 있던 신앙의 혼돈에 빠져 삶의 의욕까지 잃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온종일 손님 없는 날도 늘어만 갔다. 고요한 가게를 지키는 것은 지옥이었다. 생존을 위협하는 무서운 무엇인가가 발 앞에 마주 서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 쎄라를 향한 미움, 교회를 향한 실망감, 세상을 향한 불평이 가슴을 번갈아가며 후벼 팠다.

산소가 고갈된 상점 안에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엔젤라는 문을 활짝 열었다. 어항의 수면 위로 떠올라 뻐끔거리며 산소를 마시는 붕어처럼 입을 벌렸다. 길 건너 Salon Beauty 출입문이 보였다. 웃고 떠들며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쎄라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비참해진 엔젤라는 아침에 눈뜨는 것이 두려웠다. 손님 없는 빈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은 감옥의 독방에 있는 것과 같았다. 수 없이 많은 공상과, 미움과,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과, 두려움이 뇌리를 들락거리며 비수가 되어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허무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뜨겁게 눈물이 흐르는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흐느끼며 하나님께 따졌다. '당신을 위해 죽기 살기로 헌신했는데 생존하기조차 힘겹습니다. 세속적인 생각만 하는 쎄라의 상점에는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그것을 비참한 눈으로 바라보게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적막한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견딜 수 없는 엔젤라는 비즈니스를 접었다. 교회도 떠났다. 인생의 외로움과 허무함을 해결하려 수녀원으로 갔다. 쎄라에게뿐 아니라 교인들과 목사에게도 말없이 떠났다.


쎄라는 엔젤라만 생각하면 우울해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이유가 뭘까? 착하고 순수한데, 가깝게 지내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되지를 않은 것일까?"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리움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엔젤라의 생각으로 우울해하던 어느 날이었다. 우체통에 편지 한 통이 있다. 발신인 이름이 엔젤라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우체통 앞에선 채 서둘러 엄지와 검지로 봉투를 찢었다. 쎄라는 서서 빽빽하게 써 내려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쎄라, 오랜만이야. 많이 보고 싶었어. 하루도 쎄라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쎄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사도 없이 떠난 나를 많이 미워했지? 이제야 내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어."

편지에 눈물자국으로 잉크가 번져 있었다. 쎄라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사실, 쎄라만이 아니고 모두에게 말없이 떠났어. 말할 용기가 없었어. 아니, 만나고 싶지 않았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 어머니가 바람이 나 집을 나갔어."

"그랬었구나."

쎄라는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엔젤라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궁금증이 일어 차분하게 꼼꼼하게 눌러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가 그렇게 됐을 때 창피함과 절망감에 죽고 싶었어. 그러다 겨우 힘을 내 외로움과 상처를 해결하려 교회에 나갔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많은 위로를 받았어. 상처도 치료가 되었어. 그리고 어머니를 용서하였어. 하지만 어떤 때가 되면 그 상처가 되살아나고 내가 한 용서는 물거품이 되었어. 하나님을 향한 죄의식, 나 자신을 향한 자괴감, 세상을 향한 분노가 일었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밝음과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사람을 사귈 수는 없었어. 그렇게 말 없는 소녀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지. 너를 만나곤 더욱 소외감을 느꼈어."

쎄라는 긴장되었다.

"너의 자유로움과 발랄함에 기가 죽었어. 그래서 교회와 너를 떠난 어느 날 난 신앙을 통해 아픔과 실망과 공허함에서 자유해진 것이 아니고 신앙을 피난처로 삼고 있었던 것을 알았어. 영원한 천국의 환영에 사로잡힌 영혼이 되었던 것이지. 그리고 환영을 좇아 나의 생명까지 바치려 했던 거이야. 신앙 행위에 성실하고 교회에 충성하면서 희생적인 삶에 보상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지만 마음의 상처조차도 치료되지 않은 것을 알았어. 그러며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네가 죽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기도까지 했던 거이야. 질투에 노예가 된 줄도, 허황된 신앙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쎄라는 숨이 멋는 것 같았다.

"이제야 보상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임을 알았어. 상처를 위해 도망간 피난처에서의 삶은 나를 점점 더 외롭고 우울하고 무능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을 알았어. 내가 너의 감각과 진리에서 오는 공감의 언어 이야기를 들으며 내 영혼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아."

쎄라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와 공감의 언어로 소통하는 행복의 길,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을 걷도록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오히려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하나님의 심장에 못을 박으며 살았어. 용서는 이해에서 출발돼야 하는 것도 알았어.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는 말씀이 멈췄던 호흡을 다시 시원하게 시작하게 하는 것 같았어. 비로소 어머니를 용서하고 상처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어.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게 됐어. 한없이 연약한 한낱 인간이었던 어머니를 말이야. 그녀에게 어떤 상처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완벽한 율법을 그녀에게 들이대고 나 자신이 상처받고 신음하며 살았던 거야. 이후로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며,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일이 무엇인지를 찾았어. 나처럼 상처받고 어리석음에 매여 있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게 하는 일을 해 보려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쎄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쎄라는 엔젤라를 안고 한없이 울고 싶었다.

"네 옆에서 비즈니스를 한 시간들이 생명처럼 소중하다는 걸 알았어. 바보 같았고, 미련했고, 창피한 날들이었지만 너의 우정을 이제야 마음껏 느껴. 비록 고독과 생존의 위협을 느꼈지만 너와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 같아. 아니, 노예 된 인간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된 거야.

이태리 식당에서 네가 와인을 마실 때 난 가슴이 쿵쾅거렸어. 어처구니없이 바보스러웠던 나를 떠올리니 헛웃음이 나와. 예수님은 제자들과 빵과 포도주를 함께 마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난 두려워 떨고 있었으니 말이야. 예수님의 몸 된 피를 사탄의 음식이라고 여기고... 우리가 피가 되고, 때로는 입술의 기름이 되고, 때로는 음식의 맛을 돋우고, 때로는 용기를 주고, 때로는 흥을 돋우며, 때로는 우리의 가면을 벗게 하고 어우러지게 하는 공감의 언어와 감각을 위한 것인 줄도 모르고….

그 와인을 지금은 즐겨.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을 느껴. 너를 만나 이태리 식당엘 가 갈릭 냄새 물씬 풍기는 파스타와 함께 레드 와인을 마시고 싶어. 공감의 언어로 실컷 수다를 떨면서...

쎄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활짝 웃었다.

"쎄라를 사랑하는 엔젤라가 수녀원에서."

쎄라는 책상에 앉아 웃다 울다를 거듭하며 답장을 써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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