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신앙
이미 승부가 결정된 '250'에 가까운 바둑알을 바둑기사들이 한 점 한 점 복기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재들이네"라는 감탄과 함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때 '너도 몇십 년이 지난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잖아' 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렸다. 난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깊은 고뇌와 진심 가운데 받은 상처와 기쁨을 시간 따위는 아랑곳없이 가슴속에서 머무르게 하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였다.
첫 목회 시간에 "여러분과 진실한 친구가 되고 싶다"라고 했던 말이 방금 전에 한 것처럼 떠올랐다. 신선하게 받아들이며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눈망울들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찡그린 표정들도 있었다. 이들이 구설수를 만들어 동네방네 떠들던 말들이 내 귀에 들어오기도 했다. "목사가 성도들과 친구 되자는 의도가 뭘까?"라는 야릇한 의문을 담은 후렴을 붙여서. 예수님도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는데... 투덜대며 난 홀로 가슴앓이를 했다.
그즈음이었다. 나를 아끼는 분의 안타까운 눈폭탄 같은 충고에 다리의 힘이 쏙 빠져 주저앉고 싶었다. "목사님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지 않아 헌금도 할 수 없고 열심히 일 할 수도 없어요. 설교는 간단명료해야 해요. 믿어라, 충성해라, 순종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 그리고 큰 소리의 아멘으로 화답하게 해야 해요."
은퇴 후 쓰라림과 행복의 순간들을 복기하며 세상을 밝히 보는 계기로, 진리를 깨닫고 인격을 익히는 영양제로 삼으며 신앙을 새롭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AI 시대'를 사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쉽고 재미나게 글짓기하려 공부하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한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2-3년 목회하며 후임까지 세워달란다. 담임 목사는 어떻게 된 걸까? 상처 속에 이루어진 일은 아닐까? 급하게 사임한 사연이 궁금해졌다. 확인을 했다. 원하는 자리로 이동한다는 담임 목사의 이야길 듣고 홀가분해졌다. 첫 키스 할 때 보다 더한 설렘이라고 말하면 아내가 토라질까? 지난 바둑을 복기하며 다듬은 후 챔피언 쉽에 출전하는 바둑 기사라도 된 듯 흥분이 됐다.
이번엔 "천국"을 첫 화두로 삼기로 했다. 신앙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곳은 어디든 천국이라고 정의하고, 이 천국을 살아서 경험하다 영원하게 누리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눌 계획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이를 위해 몸과 감정과 이성의 어울림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실체를 나누어야지. 우리 안에는 가꾸어지지 않은 질투, 미움, 사랑,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욕정, 의로움 등이 널려 있어 감정이 냄비에 죽 끓듯 하기 일쑤다. 그래서 자신을 지질하게 하기도, 거칠게 하기도, 미친 듯하게 하기도, 의롭게 하기도, 가치 있게 하기도, 아름답게도 한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감정만 뜨겁게 하여 교회를 부흥시키면 세상사람들이 원시인 보듯 하는 신앙인들이 될 것이 뻔하다.
난 이러한 감정을 다스리고 가꾸는 일을 성도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영성 훈련의 시작인 감정의 뿌리를 보는 일을 내가 먼저 하기로 했다. 아내와 아들과 딸의 한마디와 눈길에 울고 웃고 삐치는 어린아이 같은 나, 열등의식에서 오는 질투와 미움과 두려움과 노여움 등에 괴로워하는 나.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더 많은 것이 있을터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드러내며 영혼을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결하게 하기로 했다. 나에게 닥쳐진 사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실력이 커지고 이에 대응할 사랑과 진리의 음성을 듣게 되겠지....
다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성경의 난제들을 나누기로 했다. 하나님은 왜 사단과 소곤거리며 모범된 신앙을 가진 욥에게 아들과 재산과 건강까지 잃게 한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믿음 없는 불평을 하신 것일까? 왜 에덴동산 중앙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일까? 왜 제사를 잘 드린 아벨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제사를 잘 드리지도 못하고 거짓말까지 한 가인의 생명은 지켜주신 것일까? 왜 논리에 맞지 않아 믿기 어려운 것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 질문하고 답하며....
숨겨진 진리를 깨달아 지혜에 눈뜨는 즐거움을 맛보는 공동체가 되겠지? 지혜가 감정을 아름답게 만들고 이성이 자라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지겠지? 그리고 자연스레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로 행복지수가 높아지게 되겠지? 그렇게 잘 익은 인격에 주어지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서로 친구가 된 평등함과 사랑 가운데 감정과 이성이 아름답게 조화된 공동체의 꿈을 품는다. 감정에만 치우친 신앙의 상처가 사라지고 새로운 꿈으로 탄생한 사랑의 천국에 이미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