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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위 ouioui Jun 03. 2020

수세미 잔혹사

주방의 요정 '건(dry)'과 '습(wet)'

주부 3년 차로 이제 좀 실력이 늘었다 싶은 부분 두 가지:
1. 비운다. 보이는 것과 숨길 것을 구분, 적절히 배치한다
2. 주방 살림은 '건'과 '습' 두 가지만 알면 된다


 물에 담가 둬야지만 되는 일들이 있고, 모든 물기가 완전히 말라야만 되는 일들이 있는데, 이게 주방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현상과 활동의 전부다. 제대로 안 지켜지면 살림하는 당사자만 힘들어지므로 되도록 주의점이나 노하우를 잘 지키려고 한다. (건과 습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2탄에서 하겠다)

 그 노하우 중 한 가지가 수세미 관리인데, 나는 수세미 유목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 가지 타입에 정착하지 못했다. 미국 마트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는 스카치 초록 수세미는 너무 빳빳해서 사용감이 좋지 않았다. 일회용 페이퍼 타월형 수세미는 왠지 환경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졌고, 너무 얇아 제대로 닦이는 느낌이 들지 않아 세제를 더 자주 펌핑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그물망형 수세미는 잘 마른다는 장점이 있지만 흐물흐물해서 나와는 맞지 않았고, 그나마 나에게 잘 맞는 손뜨개형은 잘잘한 음식물 찌꺼기가 쉽게 끼었다. 게다가 설거지 후 축축한 상태에서 수세미 받침에 올려두면 건조가 잘 되지 않아 위생적으로 좋지 않았다. 수세미를 자주 살균하는 만큼 금방 상해서 갈아치운 것만 수십 개다.

 왜 멀쩡한 식기세척기를 놔두고 수세미에 그리 집착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원래 그랬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미국에 시집와서 가장 좋은 것이 식기 세척기와 싱크대 속에 설치된 음식물 분쇄기였을 정도로 설거지는 전적으로 기계에게 맡겼던 나였다. 많은 양의 그릇들도 10분 만에 대강 헹궈서 넣어두면 알아서 설거지를 해주고, 끝난 후에 열어보면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빵처럼 나오는 모습이 어찌나 흡족하던지. 하지만 아기를 임신하고부터는 세척기가 설거지를 해주는 것이 영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일이 다시 손으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 집 수세미는 마치 발레리나의 토슈즈처럼 빨리 닳고 빨리 교체되었다.

 설거지는 깨끗한 것에서부터 기름기가 많거나 양념이 많이 눌어붙은 것 순으로 한다. 깨끗한 것들 중 가장 처음은 깨지기 쉬운 것들, 이를테면 유리컵이나 와인잔 같은 종류이다. 와인잔은 뜨거운 물로 잘 헹궈서 빳빳한 리넨 수건에 엎어놨다가 몇 분 후 원래대로 세워서 말린다. (깨끗하게 삶아 건조한 리넨으로 닦아서 말리는 방법도 좋다.) 식기 세척기에 넣어놓고 말렸다가 와인잔의 스템 부분이 두 동강 나는 참사를 겪고 깨달은 방법이다. 제일 마지막은 무조건 생고기나 생선을 손질한 도마와 칼이다.

 또한 1차(애벌) 설거지를 하며 그릇들을 종류별로 분류하면 효율성이 더 높아진다. 나에게 1차 설거지란, 보기 싫은 음식물 찌꺼기들만 헹궈내며 그릇들을 분류하는 단계를 말한다. 사기그릇은 사기그릇대로 쌓고, 평평한 접시, 스텐 냄비류, 수저, 칼이나 국자 등의 조리 도구 등을 내가 보기 편한 대로 분류하여 쌓아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2차(본격) 설거지를 할 때 뇌를 덜 써도 되는 '자동운전 모드'가 되어 편하다.


-나의 꿀팁-

 이때 일회용 수세미 한 장을 오분의 일로 자른 것을 이용한다.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나의 편의와 정신건강을 고려한 나름의 묘책이다. 애벌 설거지가 끝났을 때쯤에는 이 작은 수세미 조각이 아주 너덜너덜, 시뻘게져 있는데(찌개류나 토마토 파스타 같은 것을 먹은 날이면 더더욱) 마지막으로 생고기를 손질한 도마나 칼을 닦거나 가스레인지 스토브까지 닦는 데까지 이용하면 그제야 죄책감 없이 버릴 수 있다.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기 싫은 날에는 1차 설거지까지만 해 놓으면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매우 칭찬할 것이다. 그릇에 남은 음식물의 잔해들에 '건'의 요정이 마법을 부려다 말라 버리면, 그것을 닦는 데는 더 많은 에너지를 요하기 때문이다.)

 본격 설거지는 뜨개질 수세미로 한다. 이것은 단 한 번의 세제 펌핑만으로 풍성한 거품이 생성/유지되기에 나름대로 오랫동안 그릇을 닦을 수 있어 좋다. 이 단계에서 나의 뇌는 거의 휴식모드에 들어가는데, 이미 그릇들이 분류되어 있고 거의 깨끗한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다. 설거지를 하며 의식의 흐름에 따른 여러 가지 잡생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그게 나는 참 좋다. 단상들을 설거지 후 메모해 두었다가 일기나 에세이로 발전시키면 설거지 외에도 소득이 있는 셈인 것이다.

 설거지 후에는 수세미를 공중에 '걸어서' 말린다. 전에는 싱크대 안쪽에 붙이는 철제 수세미 홀더를 썼었는데, 자꾸 물때가 끼고 잘 마르지 않아 고민이었다. ('습'의 심술) 그런데 싱크장 위 캐비닛, 그러니까 상부장 밑에 기다란 봉을 달아서 거기에 S자 훅을 달고 손뜨개 수세미를 걸어두니 잘 말라서 좋았다. 건과 습이 얼마나 주방 일에 중요한 개념인지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랄까.


 다 쓰고 보니 어쩌다 내가 설거지, 아니 수세미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됐나 신기하다.(웃음) 정약용 선생께서는 유배 중에 자신의 아들들에게 실용적인 배움과 나눔의 중요성에 대한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를테면 과일, 채소, 약초를 직접 재배하여 그 노하우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당시 양반의 신분으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활동을 장려하셨던 것이다. 나를 선생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상황을 유배지에(ㅎㅎ) 비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노하우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 알기에 나 또한 작게나마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다. (살림 고수님들은 귀엽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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