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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겁쟁이 선비 Nov 10. 2023

심신일여(心身一如), 몸과 마음은 서로를 비춘다.

But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서 I am 혼란해요.



대학내일이 과거 무가지로 각 대학에 지면 매거진을 배포하던 시절, 독자들을 대상으로 자유로운 주제의 기고 칼럼을 실어주던 '20's Voice'라는 코너가 있었다. (인쇄 간행만 안 하는 것뿐이지 대학내일은 여전히 온라인 플랫폼에 콘텐츠를 발행하고 있다. 20's Voice라는 코너도 검색해 보니 2023년 4월 11일까지 게재된 아티클이 있었다.) 2016년과 2017년, 군 전역 후 각성해 버린 복학생의 진심 공부모드로 4점대의 학점을 우스운 듯이 찍고 당연하듯이 전액 장학금을 받았던 당시의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무쌍을 찍어버린 작문에 대한 자신감'과 '변해버린 스스로의 자화상에서 마주한 모종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에세이를 써 대학내일에 투고했다. 먼저는 기고한 글이 실린 인쇄물을 남겨 일종의 공인된 '작문 명예훈장'으로 삼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두 번째는 20대 사회의 대형 미디어인 대학내일에 게재되기로 선택받은 글, 그 '작문 명예훈장'으로 주변으로부터 글 좀 쓴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인정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실릴 줄 알았던 나의 에세이는 한 달 넘게 회신 없는 메일과 함께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렸고, 그대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G메일 발신메일함 한편에 쌓여있었다.


지하철 통학길에서 핸드폰 보는 대신 대학내일을 읽었다. 꽤 재밌기도 했고. (대학내일 911호 Cover)






그렇게 방치 중이던 이 에세이를 발견하게 된 건 정말 상당한 우연이였다. 얼마 전부터 구독하기 시작한 유튜브 프리미엄의 무료 체험판 기간이 끝나서 유료 결제된 계정의 인보이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접속했던 G메일의 수신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정말 우연찮게 발신함을 눌렀는데 페이지 맨 뒷 장에 2017년 10월 11일 '대학내일 20's Voice_칼럼 투고'라는 제목의 발신 메일이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했던 과거 상황의 기억들이 불현듯 스쳐 지나가서 부랴부랴 메일함을 열어 첨부파일을 다운로드하고 천천히 읽어보았다.


결말과는 다르게 발신 메일 텍스트에서 알 수 없는 상당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했을까. 남는 건 한없는 부끄러움과 자조적 반성뿐이다. 생각을 유려하게 표현하지 못한 빈약한 필력에 너털웃음이 날 뿐이다. 물론 지금 저 소재로 다시 글을 써도 자기만족적인, 멋들어진 글을 쓸 수 있을까 여전히 의문이긴 하지만. 그저 6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읽어보니 떠오른 부끄러움과 함께 과거에 잠겨 있었던 먼지 쌓인 내 사고의 편린과 재회했다는 소소한 기쁨만이 남는다. 그 즐거움에 더 얹어서 현재의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 유달리 느끼는 바가 있게 만든 인사이트가 담겨있어서 브런치의 지면을 빌어 해당 에세이를 그대로 남겨본다.






심신일여(心身一如), 몸과 마음은 서로를 비춘다.


예전의 내 인상은 날카로웠다. 어느 누구도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너무 오래되어서 스스로조차 '내가 그랬었나'라고 반문하게끔 만드는 궂은 인상이 옛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지극히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염세주의자였다. 사진 속의 나는 그런 정신 상태를 반영하듯 눈매는 타인을 향해 신랄한 시선을 던졌고, 입은 비죽였으며, 턱 선과 콧대는 날이 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싸늘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이런 인상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대외적으로 나를 압박하는 환경들이 만들어 낸 다부진 몸과 날 선 얼굴이 생각에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대내적으로 어려움을 안긴 가정 형편이 빚어낸 관념들이 내 인상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러한 내 인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아주 단편적으로 그때의 내가 얼마나 날이 서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기사를 동생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막 걸어 다니며 옹알이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어린 사촌 동생이 나를 만나러 왔었다. 내 딴에는 최대한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지만 그 아이는 나를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선 아이를 안아 든 누나가 인상 찡그리지 말고 활짝 웃으라고 일갈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누나가 아기를 향해 보여주던 환한 미소를 내게 지어주셨다. 당시의 난 그 미소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나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군 복무였다. 입대 전 몸무게 68kg의 마른 체형이 규칙적인 생활 패턴과 훈련, 체력단련에 의해 상병 2호봉을 기점으로 78kg의 건장한 체형으로 변했다. 그런데 변한 건 체형이나 체중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생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입대 전에는 몸도 얼굴도 뾰족뾰족, 마음도 뾰족뾰족했는데 입대 후에는 몸도 얼굴도 둥글둥글, 마음도 둥글둥글하게 변화했다. 신체의 변화 후 일어난 정신적 변화의 원인이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영향인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생긴 보상인지, 넓어진 경험의 폭 때문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변화가 내 삶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전역 후 만난 고교 절친들은 변한 나를 보고는 크게 놀랐다. 우스갯소리로 ‘예전의 그 사람은 어디 갔느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질문 세례를 던졌다. 말문이 막힌 나는 그렇게 많이 변했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도교와 불교에는 심신일여(心身一如), 심신일체(心身一體)라는 사상이 녹아있는데, 사람의 정신과 신체는 본디 하나라는 관점이다.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다.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같은 모양일 수밖에 없고 ‘하나’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은 거울이 되어 서로를 비추고 투영한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영향을 받는다면 자연스레 다른 한쪽도 그 여파를 같이 받게 된다.

내 경우는 신체가 바뀌자 정신도 생각도 변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바뀌니 표정도 바뀌고 생활도 변했다. 그것도 누구나 쉽게 그 변화를 눈치챌 만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변화가 미친 효과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경험을 계기로 하루의 첫 일과를 시작하기 전 거울을 들여다보고 마법을 건다. 내 인상이 좋지 않다면 생각을 바꾸는 마법을, 마음이 불편하다면 얼굴을 고치고 활짝 웃는 마법을 건다. 그 마법은 이제 3년 전 나를 보며 울던 그 아이를 “삼촌이 제일 좋아”라고 말하게 만들어주었다. 삼촌을 부르며 환하게 웃고는 내 품에 뛰어든 아이의 눈빛에는 지난날 어머니가 보여주셨던 미소를 짓는 내 얼굴이 서려 있는 게 아닐까.






그때 경험했던 삶의 변화가 꽤나 드라마틱했는지 저 당시의 나는 심신일여 심신일체를 꽤 신봉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도, 결합할 수도 있고 때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종속적일 수도 있다가 또 독립적일 수 있다. 심신일여 심신일체는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은 반례는 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우리 주변에서도.


1세기 제정 로마의 풍자시인이었던 유베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 55 ~ 140)는 당대 유행했던 검투 경기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벌크 업에만 매진했던 청년들을 비꼬면서 자신의 시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Mens sana in corpore sano)'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몸에 신경 쓰는 만큼 영혼과 마음의 정진에도 힘쓰라고 했다.(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건 다들 사춘기에 소싯적 겪는 경험이기도 하다. 마음의 건강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건강 상태가 사람마다 상이한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무튼 소싯적 경험과 관련해서는 아주 유명한 MBC 청소년 드라마 <사춘기>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육체미 소동'이 있다.)


누가 꼭 뭐 하라고 강제로 시키면 이유불문 하기 싫어지는 게 국룰이다. (카지와라 잇키, 가와사키 노보루의 '거인의 별' 中)


2천 년 전에도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이 따로 놀던 사례가 있었는데 현대라고 다를까. 지금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이리저리 치인 n년차 사회인들은 다들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화신이 되어 아무렇지 않게 속과 다른 겉을 들고 다닌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2017년 아침마다 열심히 걸었던 마법은 2023년 출근을 위해 부지런히 씻고 시간 맞춰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가느라 사라진 지 오래고, 미소와 웃음은 사회생활하면서 되려 가짜 웃음, 거짓 미소만 늘었다. 심지어 몸과 마음의 유리(遊離)가 비단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당장 1~2년 사이의 뉴스만 들춰봐도 몸이 건강한데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 정신은 건강한데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로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비단 몸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으로, 마음의 건강이 몸의 건강으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그렇기에, '대학'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일러둔 것처럼 미시적인 나에서부터 거시적인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심신일여 심신일체를 통한 건강의 회복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 중 하나의 건강이 다른 하나의 건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노력. 또는 몸과 마음 모두의 건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도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풍부하며 성격이 유순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몸과 마음의 건강이 병행하도록 만드는 작업은 필요한 일이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이루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는 불행 회피, 행복 실현을 위해 노력해 볼 만하지 않을까. 방법은 각양각색이니까.


부제로 붙인 것처럼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그 결과는 혼란과 혼돈이다. 몸과 마음이 독립적일 수 있고 분리될 수 있다고 했지만, 원래 하나처럼 설계된 애들이 따로 노니까 고장 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때문에 작금의 내가 마주한 혼란과 혼돈도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움직인 것에 일부 기인한다. 그래서 6년 전 에세이에서 발견한 심신일여 심신일체의 인사이트를 빌려 마주한 문제를 개선하고 해결해보고자 한다. 몸의 화음(Chord)과 마음의 화음(Chord)을 맞추면 자연스럽게 하모니가 흘러나오겠지? 그렇게 본래 설계된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리면 행복도 자연스레 그 몸과 영혼에서 흘러나오지 않을까.


행복을 찾아 떠나보자. (물론 퇴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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