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잊히지 않는 향기
고등학교 때 이별을 경험하고 성인이 됐을 무렵이었다.
그와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이제는 별 감흥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더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밥 한 톨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던 내가 밥만으로는 부족해 라면까지 끓여 먹을 정도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내가 밖으로 나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웃으며 즐겁게 놀았다. 즐거웠다. 아니 행복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놈이 아니라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한참을 놀다가 '다른 놀거리가 없나' 싶어 길거리를 방황하던 중 친구들이 나에게 묻는다.
"너 저번에 연락 안 된 적 있었잖아. 왜 연락이 안 된 거야? 그때 우리 엄청 걱정했잖아."
친구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는 있었겠지만 자기네들이 먼저 언급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둘러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그냥 휴대폰이 고장 났었다고. 내 답변에 친구들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가 이어 말했다.
"어? 화장품 가게다! 세일도 하네!"
내 말에 친구들의 시선은 모두 화장품 가게로 돌아갔고 이내 신난 듯 거기로 몰려갔다. 딱히 필요한 건 없었지만 그냥 이것저것 만져보고 발라보며 가게를 구경했다. 친구와 어울리는 틴트를 추천해주고 살까, 말까 고민하는 친구에게 명쾌한 해답을 내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득 익숙한 향기가 코 끝에 맴돌았다.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그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보았다. 질릴 만큼 맡았던 그 향기. 항상 그가 뿌리던 향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는 없었고 그가 뿌리던 향수 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정말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며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하곤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말리기는 했으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왔다. 정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눈물을 멈춰있었고 정신은 멍해졌다.
내가 왜 집으로 왔을까, 갑자기 내가 연락했을 때도 거절하지 않고 바로 나와준 친구들을 놔두고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그까짓 남자가 뭐라고.
난 염치없이 다시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감동적 이게도 친구들은 바로 집 앞이라고 문 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집 문을 열자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왔다. 그날은 그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지나간 아픔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향기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 현재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