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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미 May 05. 2021

06. 인간관계

내가 인간관계에 매달리지 않게 된 계기

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을 앓던 아이였다. 주변 어른들이 항상 나보고 '착하다' '넌 어쩜 이렇게 배려심이 깊니?' '어른스럽네' '너희 부모님은 걱정 없겠다' '역시 넌 착한 아이구나' 등 마치 어떤 상황에서든 착해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일에서도 배려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의 말을 했다. 그래서 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내 감정을 숨기고 착한 척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참고만 살던 나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부서도 대학부에서 문화부로 변경되고 새로운 부서의 기사를 쓰기란 쉽지 않으며 외부취재도 거의 매일 나가야 했다(다음화에 이야기 풀 예정). 그런데 내부에서, 그것도 동기 사이에서 계속 갈등이 발생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힘듦이 한 번에 몰려오니 감당하지 못해 자취방에서 운 적도 있다. '신문사에 괜히 들었갔나'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취재하는 거, 기사 쓰는 거, 퇴고 받는 거 등등 일하는 거에는 엄청 힘들단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정말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남자친구였다. 같은 신문사에서 일하는, 말하자면 사내 커플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내 상황을 이해해주고, 나를 위로해줬다. 


어느정도 갈등이 풀리고 겉으로는 B와 잘 지내며 생활하게 됐다. B가 나보고 말을 놓으라고까지 한 거 보면 정말 나와 친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기사 쓰는 데 신경이 쏠렸던 때였다. 열심히 기사를 작성하고 막차 시간이 돼 버스를 타러 가는데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신문사에 우산이 있던 게 생각나 남자친구한테 전화를 해 우산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상하긴 했으나 요즘 신문사가 바쁘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비를 온전히 다 맞으며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전화가 왔다. 


"어, 왜 전화 안 받았..."


-선배~!! 거기 서요!!

"식미야! 나 살려줘!"


"그게 무슨 말..."


-선배 식미한테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살려주긴 무슨! 깔깔깔. 빨리 거기 서봐요!

"식미야! 식미야!"


화가 났다. 나는 비 맞으며 쓸쓸하게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중인데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그 사건의 원흉인 B와 함께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다는 게 너무 열받았다. 일단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차피 지금은 말이 안 통하는 상태니까. 그러면서 지금 내 뺨에 느껴지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른 채 묵묵히 걸어갔다.


집에 들어와서 씻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왜 그런식으로 전화를 했을까, 밖에 비가 오는데 내 걱정은 단 하나도 하지 않은 걸까, 단순히 선배니까 후배와 장난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그렇게 씻고 나오니 휴대폰엔 부재중 전화 몇 통이 찍혀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거니 왜 전화를 그렇게 끊었냐는 되물음 뿐이었다. 그 말이 나의 발작 버튼을 꾹 눌렀다.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정리해보면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화날 상황이었단 걸 화를 내며 설명했던 것 같다. 잘 전달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남자친구는 잘못했다며 사과했고 그 소리마저 듣기 싫었던 나는 그냥 알았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후 B는 싸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에게 다가와 퇴고 받기 전인 기사 원고를 보여주며 어떻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정말 나도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 이런 말하면 안 되겠지만 주어-서술어 관계가 하나도 맞지 않고 문장과 문장 사이, 문단과 문단도 이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기사는 처음에 이 기사가 어떤 기사란 걸 알려주는 '리드문'이 생명인데 그걸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파악되지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글이 중구난방이었다. 그러면서 나보고 퇴고를 해달라고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해 내가 퇴고를 하는건 선임기자나 부장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행위인 것 같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적절한 이유를 들었으니 B도 알았다며 돌아갔다.선임기자와 부장도 그 기사 퇴고를 버거워하는 게 눈에 보여 조금 미안하긴 했다.

이와 비슷하게 일적으로도 부족한 모습을 계속 보이는데 신문사 워크샵에선 교육이 부족해서 그렇다니, 더욱 체계적이야 한다느니, 현재 신문사는 잘못됐다느니 등등 워크샵 분위기를 급격히 다운시켰고 자기의 부족이 신문사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정말 웃겨서 말도 안 나와 다른 기자들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신문사의 운영 방식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하면서 국장님에게 모욕적인 말과 인신공격을 했고 결국 내부회의를 통해 B를 자르기로 결정됐다. 그래서 국장님이 B와 면담이자 마지막 대화를 했는데 이러한 처사를 거부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순 없으나 여러 과정을 통해 결국 B는 나가게 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B가 단톡방에서 "그동안 고마웠어요"란 말을 보내며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이 났는지 알게 됐다. 나는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했으나 이미 B가 단톡방을 나가버렸고 이에 "뭐야, 인사하려고 했는데 나가버렸네"란 내용을 올렸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B에게서 전화가 왔다. B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며 따졌고 순간 화난 나도 예의없는 말투로 "뭐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왜 반말하냐며 따졌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혼자 말을 놓은 것도 아니고 먼저 말 놓으라해서 말을 놓은 것뿐인데 갑자기 왜 반말을 하냐니.


더 따질 수 있었으나 손님이 계산해달라고 했고 나는 "지금 알바 중이니 잠시만요"라 말한 후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잠시 후 확인해 보니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B와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뭔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 들면 안 되지만 "더는 걔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된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행복해졌다.


그 후로 B와 친하게 지내던 동기와 얘기를 나누는 일, 믿었던 부장이 B를 다시 데려와도 되냐는 질문을 한 일, 신문사 조교를 통해 B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일 등 스트레스받은 상황이 많았지만 B에게 직접 받는 스트레스는 없어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면서 느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순 없으며,
누군가는 날 분명히 싫어할 것이니,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만 신경 쓰면 되는 구나


그렇게 난 더이상 인간관계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믿어주고, 나를 배려해주는 좋은 사람들에게만 잘해주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피해를 해주는 사람은 과감히 관계를 끊을 수 있게 됐다. 어찌보면 B를 만나 나의 착한아이 증후군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지금은 나름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그렇다고 다시 연락하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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