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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아리콩 Aug 03. 2022

복수극이라는 판타지를 깨부수는

영화 <미스틱 리버>


"아주 사소한 결정 하나가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해봤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는 인간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외면할 수 없도록 무거운 질문들을 짊어지게 한다. '미스틱 리버’는 끝을 향해 갈수록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 초반 지미와 션, 데이브는 마르지 않은 시멘트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다. 규칙을 무시하는 지미, 그런 지미를 따라 이름을 새기는 션, 이름을 다 쓰지 못한 데이브. 쓰다 만 이름은 결국 끝까지 쓰이지 못하고 굳어 25년이 지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미는 여전히 규칙을 무시하고, 션은 폭력을 방관하며, 데이브는 쓰다 만 이름처럼 결말을 맞이한다. 그들의 운명은 11살에서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딸 케이티를 잃은 지미는 션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때 우리가 차를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이 질문은 누군가는 반드시 그 차에 타고 피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들은 누구도 차에 타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왜 데이브만 잡아가냐고 따져볼 수도 있었고 데이브의 손을 잡고 도망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미와 션은 아무 말없이 멀어져 가는 차를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둘은 데이브가 끌려가는 것을 방관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에 가담한다. 실질적 피해자인 데이브뿐만 아니라 세 소년 모두 폭력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다. 영화는 세 소년이 그 폭력을 감당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 그 결과로 데이브만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시퀀스는 데이브와 부인 셀레스트가 흡혈귀 영화를 보고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이 대화는 셀레스트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 데이브는 진실을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을까? 사실 데이브는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납치되었던 때를 셀레스트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 그는 거의 미친 사람 같다. 데이브의 얼굴은 반은 빛에 반은 어둠에 가려져 피해자와 살인자의 얼굴을 오간다. 그는 폭력에 감염되었지만 아직 완벽한 흡혈귀는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뻔뻔하게 자신의 결백을 외칠 수 없다. 그는 케이티든 변태 성욕자든 이미 살인을 했고 그 사실 자체가 거대한 죄의식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는 스스로 파멸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지미는 망설임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진 폭력을 분출하는 것 그 자체다. 어두운 미스틱 강변에서 지미는 데이브를 몰아붙인다. 동시에 진범인 레이가 체포되는 씬이 교차한다. 이 시퀀스에서 모든 폭력의 화살표가 명확해진다. 데이브는 변태 성욕자를 죽였고 지미는 과거에 잭을 죽였으며 잭의 아들이 지미의 딸을 죽였다. 그리고 지미는 데이브를 죽인다. 이러한 폭력의 연결고리가 어딘가 찝찝한 것은 그 어떤 고리도 복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복수도, 인과응보도 아니며 무작위로 행해진 폭력일 뿐이다. 이는 일반적인 복수극과는 명확히 다르다.


 A가 B를 때린다. 그래서 B가 A를 때린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복수극이다. 자신을 해친 자에게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을 되돌려 준다. 이때 관객은 통쾌함을 느낀다. 복수는 A와 B의 문제일 뿐, 멀리서 구경하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이 복수극은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타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자가 정확히 그 상대방에게만 폭력을 행하는가? 현실 세계에서 폭력의 화살표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폭력은 또 다른 방향으로의 폭력으로 행해지고, 이 과정이 반복되며 폭력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간다. 감독은 이러한 폭력의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폭력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면 관객은 복수극을 마냥 통쾌하게 지켜볼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 대상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산발적으로 퍼져나간 폭력은 데이브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 보인다. 하얀 총성과 함께 끔찍한 밤이 지나고, 션은 지미에게 진실을 전한다. 데이브의 행방을 묻는 션에게 지미는 도로를 가리킨다. 어릴 적 데이브가 차를 타고 떠나던 장면이 교차하고 카메라는 어른이 된 지미와 션에게서 멀어진다. 그들은 25년 전과 같다. 지미는 방관에서 나아가 데이브를 죽음으로 떠밀고 션은 모든 진실을 알고도 외면한다. 그들은 모두 폭력 앞에서 각자의 선택을 했다. 폭력의 중심에 서거나, 그 변두리에서 벗어나려 애쓰거나, 방관하거나. 


 카퍼레이드에서 세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 보인다. 아나베스는 여유롭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다시 결합한 션과 부인 로렌의 모습도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남편을 잃은 셀레스트와 눈이 마주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션은 동정의 눈빛으로 셀레스트를 본다. 이것은 션이 폭력을 대하는 자세다. 동정심은 일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나베스는 동정조차도 없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셀레스트를 대한다. 이것은 아나베스와 지미가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방식이다. 마지막, 션은 지미를 향해 총 쏘는 제스처를 취한다.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환상을 걷어낸 현실 속 폭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폭력 앞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데이브의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가 명확해진다. 데이브는 누구보다 폭력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리고 가장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데이브와 지미, 션 이 세 사람 중에서 당신의 아버지를 선택한다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나는 지미를 떠올렸다. 그가 행한 수많은 폭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독은 데이브의 죽음을 통해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언젠가 현실에서 폭력의 구조를 대면하게 될 때,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살아남는 것. 영화가 끝난 후에도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이 나를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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