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벰버>
2014년, 한국. 어느 국제영화제는 논란의 다큐멘터리 작품에 대해 상영 금지 압력을 받았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 외국 영화의 포스터에는 남녀가 나체로 등장했다. 한국의 디자이너는 포스터를 망가뜨리면서까지 그들의 나체를 지우고 숨겼지만 검열에는 통과하지 못했다.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풍자한 화가는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그림을 내려야만 했다. 거대 자본의 도움을 받은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정부는 독립영화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결국 관객은 필터링된 예술만을 접하게 되었다. 현대의 한국에서 예술은 난도질당하고 있다. 알프레도가 외쳤듯이 예술은 죽었다.
연기를 배우기 위해 마드리드로 상경한 알프레도(오스카 자에나다)는 순수한 독립극단을 꿈꾼다. 그는 연기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다. 알프레도와 친구들은 자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거리 공연을 하기 시작한다. 1997년 9월 그들의 첫 만남에서부터 2001년 9월 그들의 마지막 공연에 이르기까지, 노벰버의 멤버들은 그 시절을 회상한다. 나이가 든 루시아는 말한다. "노벰버는 알프레도예요." 알프레도는 순수하고 거친 예술을 지향한다. 그는 예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알프레도와 노벰버의 공연은 성장하고 진화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노벰버는 예술의 삶과 죽음 그 자체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차용한다. 인터뷰 장면에서 관객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또한 거리 공연 장면들은 영화의 다른 부분들과 다르게 더 생생하고 거친 화면으로 보여진다. 연기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배우들이 실제로 공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제되지 않은 순수 예술을 말하면서 정제된 촬영과 연기로 관객을 속이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Noviembre>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있다. 이것은 아케로 마냐스 감독이 예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비록 영화가 허구일지라도 그는 '진짜 예술'을 보여주고자 했다. 노벰버의 공연 ‘슈팅’에서 보여주듯이 이러한 방식은 허구와 현실을 통합해 관객을 무의식 중에 참가시키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영화와 현실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게 된다.
노벰버의 공연들은 예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술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질문들이다. 예술인가, 외설인가? 그들의 첫 번째 공연 ‘뜨거운 여인’은 언듯 보기에 그저 외설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매체들은 검열을 하고 성적인 것을 거세한다. 하지만 그것이 외설인지 예술인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노벰버는 그것을 예술로서 보여준다. 예술은 아름다워야 하는가? ‘잊혀진 사람들’ 공연에서 그들은 사회의 소수자들을 연기한다. 노숙자, 집시, 마약중독자, 외팔이, 장님... 그 모습은 사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양지 밖으로 끌고 온다. 사회가 인식하지 못하는 소수자를 인식하게 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깨운다. 이 공연에서 그들은 예술이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예술이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가지는가? 테러리즘을 표현한 공연 ‘슈팅’으로 인해 노벰버는 고소를 당하게 된다. 검찰의 주장은 범죄를 흉내 내고 테러리즘을 정당화했다는 것. 게임이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고 만화를 보면서 모방 범죄를 일으킨다는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다. 수많은 매체와 예술의 영향 속에 사는 현대에서 현실을 표현한 예술이 문제인 걸까, 예술을 보고 영향받은 사람이 문제인 걸까?
노벰버는 ‘슈팅’을 계기로 공연이 금지되고 탄압받게 된다. 때문에 순수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다니엘과 현실에 타협하려는 알프레도는 부딪힌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검열과 탄압 속에서 예술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알프레도는 결국 돈을 받고 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공연 ‘메시아’에서 그들은 벌거벗지 못하고 속옷을 입으라 강요받는다. 다니엘은 공연 도중 흥분하여 관객과 싸움을 벌인다. 다니엘과 알리시아는 의견 차이로 노벰버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공연을 그만둔다.
술집에서 기타를 치며 살던 알프레도는 동생 알레한드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애를 가진 알레한드로는 알프레도의 꼭두각시 인형을 좋아했으나 형이 떠나고 그의 꼭두각시 인형을 모두 부숴 버린다. 알프레도는 깨어나지 못하는 알레한드로를 위해 꼭두각시는 고쳐 침대에 함께 놓아준다. 알레한드로가 눈을 뜨고 알프레도는 다시 영감을 받는다. 알프레도에게 있어 예술적 영감은 알레한드로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애를 가진 소수자로 표현되는 알레한드로는 알프레도에게 있어 소통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 수단이 알프레도에게 있어서는 예술이었던 것이다. 알프레도는 로열 극장 아이디어로 친구들을 다시 모은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근본적 뿌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공연 ‘로열 극장’에서 감독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예술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아케로 마냐스 감독은 회의적인 것이 분명하다. 알프레도는 정부 지원금을 받는 예쁜 오페라 공연을 점거한다. 알프레도의 외침은 감독의 외침이다. 너무 직접적이라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그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분명하다. 예술은 우리를 더욱 훌륭한 사람들로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총성은 진짜 총성에 묻힌다. 그네에서 떨어져 매달린 그의 그림자는 예술의 죽음을 상징한다. 루시아는 말한다.
“우린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비참하게 실패했죠.
지금은 세상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은 결국 자본의 도움으로 예술을 해야만 하는 감독 본인이 자조적으로 내뱉는 한숨 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비록 그 모든 악취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당신은 그 악취에 물들지 않기를.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언젠가 예술이 무기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꿈꾸게 된다. 예술은 미래를 장전한 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