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이유는 자아실현일까, 생계유지일까
대학 시절, 경영학 개론 수업에서 배웠던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을 기억한다. 인간의 욕구는 생존(1단계)에서 시작해 안전, 소속, 존경을 거쳐 마침내 '자아실현(5단계)'의 경지에 이른다는 그럴싸한 피라미드.
나는 순진하게도 그 자아실현의 장소가 '회사'가 될 줄 알았다. 멋진 수트를 입고, PT를 진행하고, 내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는(적어도 회사의 매출을 바꾸는) 커리어 우먼. 승진은 나의 성장이고, 연봉은 나의 가치라고 믿었다.
하지만 입사 5년 차, 나는 매슬로우 씨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선생님, 회사에서의 자아실현은 꼭대기가 아니라 바닥에 처박혀 있던데요?"
신입 시절엔 임원이 되는 꿈을 꿨다. 별을 단 장군처럼, 임원은 직장인의 신화니까. 하지만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면서 시야가 트이자,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임원들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승리자'라기보다 처절한 **'생존자'**에 가까웠다. 가정보다 회사가 우선이고, 주말 골프가 업무의 연장이며, 실적 압박에 위장약을 달고 사는 사람들. 높은 연봉의 대가는 자신의 영혼과 건강을 담보로 잡히는 것이었다.
"김 과장, 이번에 승진해야지?" 부장님의 격려가 더 이상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승진은 물론 좋다. 연봉도 오르고 어깨에 힘도 들어간다. 하지만 그만큼의 '책임'과 '야근'과 '정치'가 세트로 따라온다. 과연 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나의 행복일까? 아니면 회사가 쳐놓은 '고급 노예'의 덫일까. 나는 승진 명단보다 정시 퇴근이 더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연봉은 당신의 능력에 비례합니다." 이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내가 정의한 연봉의 공식은 조금 다르다.
연봉 = 업무 능력 비용(30%) + 싫은 사람 보는 비용(40%) + 모욕을 참는 비용(30%)
그렇다. 월급의 절반 이상은 '참을 인(忍)' 자의 값이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웃으며 넘기는 연기력, 거래처의 갑질을 견디는 맷집,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내는 인내심. 회사는 내 '재능'을 사는 게 아니라, 내 '성격'을 죽이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 내 자존심을 걸 필요가 없어졌다. 연봉이 조금 낮다고 해서 내 인간적 가치가 낮은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참아야 할 고통의 총량이 조금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물론, 많이 받으면 참을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긴 한다).
나는 쿨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회사는 내 자아를 실현하는 성지가 아니라, 내 진짜 자아를 먹여 살리기 위한 '물주(Sponsor)'다.
나의 자아는 결재판 속에 있지 않다. 나의 진짜 자아는 퇴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주말에 늦잠을 자고 읽는 소설책 한 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 있다. 회사는 그 소중한 시간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곳. 딱 그만큼의 의미면 충분하다.
노동의 목적을 **'생계유지'**로 정의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제 밥벌이를 스스로 해결하고, 내 힘으로 공과금을 내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큼 숭고하고 위대한 자아실현이 또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임원이 되는 것"이라고 거짓말하지 않겠다. 대신 속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 꿈은 이 회사에서 받은 월급으로, 회사 밖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출근한다. 위대한 혁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달 카드값을 막기 위해서. 하지만 비굴하지 않다. 나는 나의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전투터로 나가는 '프로 생계유지러'니까.
자아실현은 주말에 하자. 평일엔 돈을 벌자. 그 심플한 진리가 나를 오늘도 책상 앞에 앉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