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척하는 겁쟁이의 도피성 여행

이렇게까지 도망 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by ERIN
넌 쿨해서 좋겠다.


개인적으로 '쿨'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없애던가 혹은 애정이 없는 척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born to be cool'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른 것에 그만큼 애정을 쏟지 않거나 혹은 쏟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애정이 없는 척하는 큰 이유'는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며, 뭐 같은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항상 쿨한 척하며 살아간다.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가 여자 친구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어머, 축하해!'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결국 자존심이다. 거기서 내가 울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짝사랑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 친구가 생겼다니까 우는 처량한 애'라고 기억할 것만 같아서. 그건 정말 내 자존심상 허락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어떤 대상이던지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애정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사람들은 내게 쿨하다고 했고, 실패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은 겁쟁이였는데.


실패, 세상에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쿨한 척하는 것과 실패하지 않는 것은 때로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실패하지 않았다는 말은 도전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고, 도전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언가를 정말 갈망해 본 적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우리의 인생이 드라마 속 대본이 아니라면 실패가 없을 리가 없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는 딱히 실패한 적이 없는데요?'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나랑 비슷하게 '실패할만한 도전을 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내가 딱 그러니까.


Capture.JPG 저보다 약한 상대만 찾아서 때립니다. 김동현은 장난이지만 난 아니었다. tvn 예능 대탈출


학창 시절 줄곧 반장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반장선거가 있는 날이면 내가 그렇게 원하지 않아도 후보에는 올랐다. 그리고서 딱히 다른 후보자가 없으면 내가 반장이었고, 혹시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애가 있으면 쿨한 척 '네가 해'라며 말하곤 그 뒤에 다른 임원직을 하곤 했다. 정말 내가 착해서 혹은 쿨해서 '네가 해'라고 말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괜히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거뜬히 내가 이길 것 같은 상대만 찾아서 경쟁했으며, 내가 질 것 같다는 그런 기시감이 드는 일들은 도전하지 않았다. 대입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재수 그 1년이 뭐 그렇게 다를까 싶지만, 그때 내게 재수는 곧 실패였다. 특목고만큼의 경쟁률은 아니지만, 특목고 떨어진 애들이 온다는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서로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이 모이다 보니 내신은 다들 바닥이었다. 내신보단 수능에 강한 나였지만, 수능까지 지금의 점수를 유지해 잘 갈 자신이 없었다. 난 남들보다 뒷심이 부족한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안 나오는 내신을 가지고 눈을 낮춰 대입을 준비했고, 감사하게도 그 해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취업도 비슷한 방향으로 향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론 바로 입학도 하고, 취업도 해 내가 도전한 건 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저 실패할 것 같은 건 쳐다도 보지 않은 그런 멍청하고도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여행은 하나의 도피처였다. 대학생이 되고서 3학년이 된다는 생각에 갑자기 아찔해진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1살이나 22살이나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유난이네 싶지만, 3학년이라는 말은 곧 내게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들을 해야 하는 나이였다. 토익도 해야 하고, 대외활동도 더 많이 해야 하며, 그리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난 그 모든 것들을 의연하게 할 아직 준비되지 않았었고, 이대로 가다간 실패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휴학 핑계를 찾다가 '유럽여행'이라는 핑계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여행을 갔다 왔다. 그리고 딱 대학교 졸업 전, 한 학기를 남겨 놓고 갑자기 또 아찔했다. '어머, 나 이제 졸업이네? 어쩌지 나 아직 준비가 안되었는데?' 이대로 취업준비생을 했다가는 그저 뉴스에 나오는 실업자 수에 +1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학연수라는 핑계를 찾아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럼 여기서 멈춰야만 했는데, 나는 또 도피를 했다. 그렇게 1년을 미국에서 지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넓혔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보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면, 그냥 한국 바로 돌아와서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고 바로 취업 준비를 하면 되는데, 또 한국 돌아오기가 너무 무서웠다. 그냥 돌아가기엔 내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느낌. 그래서 그동안 모아뒀던 은행의 적금을 다 털어 내 한국행이 아닌 멕시코행 비행기를 사 남미로 여행을 시작했다.


이렇게 도피성으로 떠난 나라만 어언 20여 개국. 각 나라에서 살아가는 건 내게 매일이 도전이었고, 도전이 많다는 말은 실패를 한다는 말과 같아서 그렇게 도피성 실패 경험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성장했다. 인생에서 '준비'란 어쩌면 '준비'된 사람이 있다기보다 그냥 '무작정'하는 사람이 준비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이제 '실패를 하기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닌 '내가 더 많은 실패를 했어'라며 우스갯소리로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여행이 모든 일의 정답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인도를 가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고, 몽골에서 넓은 초원을 보면 마음을 다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다 착각이다. 결국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무슨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경험에서 얻는 생각과 깨달음은 다 다르니까.


내가 매번 도피의 핑계로 여행을 떠난 이유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냥 실패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최대의 약점이었던 '실패의 경험이 없는 애'를 깨고 싶어서 도전한 게 여행이었고, 누군가에겐 시험을 보는 것, 또 누군가에겐 연애를 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을 읽는 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많은 실패와 경험을 했는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길 수 없는 게 문득 억울해 브런치에 조금씩 남겨 '여러분! 여기 보세요~ 진짜 멍청하게 별 짓 다한 애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다. 내게 실패는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즐길거리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