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래서 환전은 어디서 해?

아, 해외에 나가면 핸드폰이 안 터지고 한국 돈은 이제 무용지물인 거구나

by ERIN

사람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는데, 당신은 언제 실패를 경험했죠?



나는 운이 좋아 무엇이든 잘하는 줄 알았다. 운도 좋고 실력도 좋고. 태어나길 똑똑하게 태어나서 남들보다 공부를 덜해도 뭐 민망하지 않을 정도는 점수를 받는구나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도 그다지 크게 지나갔던 것도 아닌 거 같고(물론 부모님 피셜은 아닙니다), 반마다 있는 선생님의 질문 받이 학생이어서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지는 걸 싫어해 성적도 무난하게 받았다. 그래서 최고는 아니지만 그냥 뭐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고 실력이 좋아 실패 없이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실패 없이.


그런데, 입사를 준비하면서, 20대였던 언니 오빠들이 30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내게 이상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는데, 당신은 언제 실패를 경험했죠?


이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았고, 이러한 질문에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넘어가면 사람들은 '뭐야 재미없게' 혹은 '솔직하지 못하네'라고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생각하다 내가 왜 실패를 안 했는지 알았다. 실패할 것 같은 거엔 도전한 적이 없고, 더 나아가서는 실패할까 봐 열심히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고? 열심히 해서 실패하면 내가 진짜 실패한 거 같은데, 열심히 안 해서 실패하면 노력을 안 한 거지 노력만 하면 성공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지기 싫어서 '열심히'는 했지만, '죽기 살기'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 난, 실패할 것 같은 도전은 시도조차 안 하는 겁쟁이였다. 그런 내게 혼자 여행을 가는 건 있을 수 없었고, 20살이 지나고도 몇 해 후에나 나는 처음으로 혼자서 길고 긴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 아빠는 '야, 괜히 중간에 자존심 상한다고 힘든데도 돌아오지도 못하고 낑낑거리지 말고 중간에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와'라고 하셨다. 사실 이 말이 아빠는 나에게 부담 가지지 말고 여행해보라는 말이었겠지만, 내겐 자존심을 한껏 긁는 말이었다. 아빠가 보기엔 나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라는 건가? 괜히 이 말 한마디에 진짜 나는 내가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올까 봐 무서워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여행이라곤 걸스카우트 여행과 가족 여행이 전부였다. 지금이야 가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해외여행을 한다는 게 일단 전화가 안 터지고,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던 무지한 애였다. 출국하는 날, 엄마한테 ‘나 환전 아직 안 했는데 어쩌지?’라고 물었으니 말 다 했다. 이런 딸을 혼자 해외로 두 달가량이나 보내야 하니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했을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간다. 내가 진짜 혼자서 어디론가 간다는 걸 참 나는 멍청하게도 비행기 좌석을 찾아 앉고, 비행기 창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면서 실감했다. 그리고 딱 드는 생각, ‘와 뭐 됐다.’


내 손에는 긴 비행시간에 읽으려고 들고 들어간 로맨스 소설과 안 터지는 핸드폰이 전부였다. 갑작스러운 조급증에 손이 달달 떨렸다. 무식이 용감 이랬던가, 나는 용감했다. 다수가 가는 길이 진리라는 생각에 내리자마자 사람들을 쫓아 지하철 타는 곳으로 갔고, 가장 영국인 같은 사람에게 내 숙소의 주소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슈렉의 고양이 못지않은 눈으로 ‘PLEASE HELP ME, I DON’T KNOW HOW TO GET THERE’을 외쳤고, 정말 친절하고도 멋졌던 신사분은 나 대신 지하철 승차권을 발권해줬다. 나는 연신 ‘THANK YOU’를 외쳤고, 지갑을 꺼내 화면에서 본 금액을 내려고 하니 그분은 첫 여행의 선물이라며 내게 지하철 승차권을 건네줬다. 정말 고마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어서 가자며 나를 이끌었고, 덕분에 나는 국제미아 신세를 벗어났다. 정말 고마워 뭐라고 주고 싶은데 줄 게 없어 망설이다가 비행기에서 먹으려고 넣어뒀던 마이쭈 한 통을 주섬주섬 꺼내 머쓱하게 건네니 너무 좋아하며 아이들과 잘 먹겠다며 고마워하던 그분에게 지금 다시 한번 더 감사함을 전한다. 덕분에 영국 공항에서 시작된 나의 도피성 여행이 지금까지도 잘 이어지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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