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과 쌤 Mar 02. 2020

밥 좀 시켜봐

어쩌면 이 말이 '갑질'이었던 것 같다.

나의 대학병원 전공의 일과는 보통 다음과 같았다. 오전 6~7시부터 회진 준비를 해서 8시에 교수님과 입원 환자 회진을 돌고 나서 처방 정리를 마무리하면 11시가 된다. 오후 회진은 보통 5시니까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준비를 시작한다. 오전 회진과 오후 회진 사이에는 병동이나 외래에서 업무를 챙기거나 응급환자가 생길 경우 일을 돕는다. 사건, 사고 없이 평화로운 날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 여유 시간이 있는 날은 별로 없다. 오후 회진이 끝나고 '공식적'으로는 오후 6시 정도에 일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의국 회의를 하고 이것저것 주어진 일과 발표 준비 등을 하다 보면 저녁 8시, 늦으면 10시쯤 하루 일과가 끝난다. 당직인 날은 다음 날까지 병원에서 지내면서 계속 일을 하고, 오프인 날은 그 시간에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온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빡빡한 일과 속에서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나는 물론이고 다른 전공의들은 식사를 제시간에 한 경우가 별로 없다. 아침과 점심을 건너뛰는 것은 다반사이고, 그나마 한 끼 제대로 먹는 것은 저녁 식사였다. 


1년 차 신입 전공의일 때는 보통 동기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의국 회의가 끝나고 단체로 중국음식이나 패스트푸드를 배달시켜서 먹었다. 그때 밥을 주문하는 사람은 그중 일이 가장 먼저 끝난 사람이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메뉴를 결정하고 음식 수량을 조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연차가 올라가고 고년차 전공의인 3,4년 차가 되면 동기들과 함께할 시간은 줄어든다. 대신에 세분화된 분과에 소속되어 그쪽 분야의 업무와 논문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나는 한시가 급한 환자를 담당하는 분과에 흥미를 많이 느꼈다. 엄마의 뱃속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나온 신생아를 보살피는 신생아학, 선천성 심장 기형을 치료하는 소아심장학, 호흡곤란 등으로 인공호흡기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담당하는 소아중환자실 등이 그랬는데, 이쪽 분야에는 업무량이 많아서 그만큼 사람들도 많았다. 분과마다 달랐지만 보통 1년 차 2명, 2년 차 1명, 3년 차 1명, 4년 차 1명, 이런 식으로 배치가 되었고 치프(Chief) 전공의라고 불리는 4년 차 전공의는 입원 환자 진료에 많은 권한을 갖고, 저년차 전공의들을 감독하고 미진한 점을 메꾸는 역할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2~3년 차이임에도 고년차 전공의의 위세는 엄청났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계급의 고하가 중요하고 나이나 임관 연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듯이 전공의의 세계에서는 연차가 가장 중요했다. 저년차 전공의는 상급 전공의가 일을 시키면 묻지도 말고 그냥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중환자를 맡는 파트의 치프 전공의가 되어 후배 전공의들과 같이 늦게까지 환자를 보고 뒤늦은 식사를 하곤 했다. 특히나 예정에 없던 중환의 치료를 하고 난 후면, 후배 전공의들에게 밥을 사곤 했다. "밥 좀 시켜봐. 너 먹고 싶은 것 알아서 시켜. 이 카드로 결제해." 이렇게 말이다. 근데 가끔 1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배가 좀 고파져서 전화를 해보면, "선생님, 죄송해요. 일이 바빠서 시키질 못했어요."라는 대답이 왔다. 나야 남은 업무가 별로 없지만, 저년차 전공의들에게는 그 이후에도 남은 일들이 많았고 밥 먹을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결국 아이들에게 "그래. 이제는 4년 차가 밥도 대령해드려야 하는 거지?"라고 툴툴대며 결국 음식을 알아서 시켜주곤 했다.


분명 후배 전공의들에게도 돈은 충분했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밥을 먹고 싶어요. 당신이 밥을 사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지금 좀 바쁘고 내 일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식사하고 싶어요.' 어쩌면 이게 바로 그들의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보면 내가 했던 행동이 바로 '갑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결정하기 좀 귀찮고, 네가 내 취향에 맞춰서 시켜보라는 듯한 태도. 물론 돈을 대신 내긴 했지만 하급자에게는 거부할 권한이 별로 없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전공의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고, 상하 위계가 엄격한 단체생활을 하지도 않는 데다가 내 연령대 대부분 각자의 가정이 있어,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게 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설사 그런 상황이 생기더라도 앞으로는 '밥은 배고픈 사람이 알아서 챙겨 먹자'라고 할 것이다. 정말 같이 먹고 싶다면 그 사람의 일정을 고려해서 거절할 수 있는 여지도 주고, 그게 바로 배려가 아닐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