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마이 : 디지털 노마드도 아무렴 3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61

by chill십구년생guy


출근하지 않아도 일은 돌아가고
오히려 어떤 면에선 더 효율적이다



방콕에서의 셋째 날 아침, 일정은 삼얀(Samyan) 지역의 랜드마크인 ‘삼얀 밋 타운(Samyan Mitr Town)’에서 시작됐다. 거대한 복합 쇼핑몰 안에 자리 잡은 세련된 전시장, 그곳에서 ‘ITE 2019(Innovation Thailand Expo)’가 개최되었다. 태국 정부 기관과 글로벌 기업들이 총출동한, 겉보기엔 제법 번지르르하고 웅장한 행사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화려한 축제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이번 행사의 ‘메인 디쉬’는 우리 같은 참가사들의 비즈니스가 아니라,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와 태국의 디지털경제진흥원(DEPA) 사이의 MOU 체결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기업들은 그럴싸한 그림을 만들어주기 위한 ‘품격 있는 들러리’에 가까웠다. 부스를 지키고 앉아 있어 봐야 실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이번 출장은 겉치례보다 실속을 차리기로



결국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전시회장을 지키는 대신, 미리 잡아둔 ‘진짜 일’을 하러 가기로 한 것이다. 개막식이 끝나고 VIP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틈을 타 주최 측에 살짝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그랩(Grab) 택시를 불러 전시장 밖으로 탈출했다. 공식 일정을 이탈했다는 미안함이 아주 살짝 스쳤지만, 금세 털어버렸다. 인생도 비즈니스도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실속’이라는 걸,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알고 있었으니까.



세 번 두드려서 열린 비즈니스의 문



한 달 만에 다시 마주한 태국 파트너사 ‘이미지맥스(Imagimax)’의 대표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이번엔 우리도 지난번처럼 빈손이 아니었다. VR 컨텐츠를 직접 시연할 장비와 꼼꼼한 기술 자료로 무장한 ‘만반의 준비’ 상태였다.


말뿐인 아이디어 나열이 아니라, 눈앞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결과물을 보여주자 회의실의 공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파트너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질문은 날카롭고 구체적으로 변했다. 서로의 니즈를 확인한 우리는 내년 초를 목표로 공동 사업 아이템을 추진해 보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그때의 나는 꽤 들떠 있었다. 당장이라도 동남아 시장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불과 석 달 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복병이 전 세계의 문을 걸어 잠글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제도보다 빠른 발걸음, 치앙마이가 옳다



이후로도 일정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태국 관광청을 방문해 우리 컨텐츠를 시연했고,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의 MOU 파트너인 DEPA 사무실도 찾았다. DEPA는 이미 한 차례 접점이 있었던 터라 낯설지 않았다. (48화 참고) 그들이 현지 스타트업을 어떻게 육성하는지 설명을 듣다 보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비즈니스 측면에선 방콕의 관료주의보단 자유분방한 치앙마이에 한 표



전체적인 느낌은 우리네 ‘한국콘텐츠진흥원’을 축소해 놓은 듯했다. 지원 방식이나 프로그램 구성이 선진국 모델을 열심히 따라가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자꾸만 어제 치앙마이에서 만났던 그 자유분방한 스타트업들이 떠올랐다.


정부의 제도와 가이드라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며,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자신들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던 그들. 억지로 끼워 맞춘 행정 모델보다, 치앙마이의 그 투박하고 거침없는 실행력이 태국에 더 어울리는 경쟁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뼈 때리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으며 미팅을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태국 최대 통신사인 TRUE의 디지털 센터를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고, 담당자들과 미팅을 진행하는 등 일정은 숨 가쁘게 이어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나흘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후일담



치앙마이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익숙하고도 강렬한 충격이었다. 아이디어를 말로만 묵히지 않고 즉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실행력, 그리고 국경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라는 듯한 그들의 사고방식. 세계를 돌아다닐수록 내가 얼마나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하는 기회가 됐다.


나는 평생을 ‘얼굴을 맞대고 앉아야 일이 된다’고 믿어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2020년 닥친 팬데믹은 그 견고한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타의로 시작된 원격근무였지만, 해보니 알게 됐다. 출근하지 않아도 일은 돌아가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며 나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2023년 3월, 태국 현지 법인을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5월, 코로나 종식이 선언되면서 나의 ‘한국-태국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1년 중 4분의 1은 해외에서 일하는 삶. 이후로 나에게 디지털 노마드는 지식으로만 존재하던 평행세계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우리는 운명처럼 이 건물에 사무실을 차린다



기막힌 인연은 또 있다. 우리 태국 법인의 사무실을 잡고 보니, 그곳이 바로 2019년 내가 ‘들러리’로 참가했던 전시회가 열린 그 ‘삼얀 밋 타운’ 건물이었다. 그저 스쳐 지나갔던 전시장이 몇 년 뒤 내 일터가 되다니. 이건 우연이라기보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글로벌 무대로 일터를 넓히니 생각의 폭도, 시장을 보는 눈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그렇게 나와 회사는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2주 뒤, 나의 또 다른 선입견을 박살 내버릴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이번엔 오랜만에, 뜨거운 사막의 나라다!




연재 브런치북 글 수 제한(30개)으로 인해 제 3권이 발행되었습니다
다음편,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 틀린게 아니라 다른거 1'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