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63
사람의 마음은 지구 어디를 가나 똑같고
취객의 인류애 또한 만국공통
아부다비에서의 둘째 날, 드디어 중동 최대의 게임 축제 ‘게임스콘 2019’의 막이 올랐다. 출장 전 검색으로 알아본 중동 게임 시장의 잠재력은 화려한 숫자와 그래프로 가득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그 숫자를 소비하는 실제 사람들의 ‘온도’가 궁금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행사장인 ADNEC(아부다비 국립 전시 컨벤션 센터)로 향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전시장 한복판에 게임 브랜드로 래핑된 람보르기니가 대놓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모형이나 전시용 컨셉카가 아니었다. 당장 시동을 걸고 아우토반을 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진짜’ 슈퍼카였다. 수많은 관람객이 오가는 혼잡한 공간에 수억 원을 호가하는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세워두는 배포라니. “역시 중동 클래스”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관람객의 열기 또한 슈퍼카의 엔진만큼이나 뜨거웠다. 특히 한국 공동관을 향한 관심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KOREA?” 하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다. 이슬람권이니까 외부 문화에 배척적일 것이라는 나의 낡은 선입견은 전시장 입구를 통과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보기 좋게 산산조각이 났다.
전시장을 누비다 보니 흥미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쇼의 꽃이라 불리는 ‘코스튬 플레이(코스프레)’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노출에 엄격한 이슬람 문화권에서 과연 코스프레가 가능할까 싶었다. 도쿄나 독일의 게임쇼처럼 화려한 피부 노출과 파격적인 의상을 기대하기는 힘든 환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문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슬람 전통 의상인 ‘칸두라’ 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로브나 외투를 걸치는 방식이었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빌런 집단인 ‘아카츠키’ 로브를 입은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검은 로브 아래로 하얀 칸두라가 살짝 비치는 모습은 묘하게 세련되고 힙해 보였다. ‘어쌔신 크리드’ 코스프레는 또 어떤가. 중동 특유의 전통 복장 위에 장비를 더하니 오히려 원작보다 더 리얼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은 종교적 율법이나 문화적 장벽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방식만 다를 뿐, 무언가에 열광하는 사람의 마음은 지구 어디를 가나 다 똑같다는 진리였다.
정신없는 전시회 첫날을 마치고 나니 밖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전력을 다해 시연과 상담을 마친 참가사 동료들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목적지는 근처 호텔에 있는 ‘옥류관 아부다비 지점’. 대한민국 국민에게 옥류관은 참 묘한 존재다. 해외에서만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먼 고향의 맛이랄까.
송이버섯과 더덕구이 같은 정갈한 안주를 시키고, 북한의 대표 술인 ‘들쭉술’을 주문했다. 과일주라는 이름에 속아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과일주가 아니라 거의 위스키급의 강렬한 타격감이었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기운과 함께 취기가 로켓처럼 올라왔다.
식당 한쪽 룸에서는 노래방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해서 슬쩍 보니 북한 남성들이 한 무리 모여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화장실을 오가다 그들과 마주쳤다. 서로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상태였다. 남한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한 민족 아닙니까!” 뜨거운 악수와 포옹이 오갔다. 남이든 북이든, 취객의 인류애는 만국 공통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밤이었다.
마무리는 역시 평양냉면. 깔끔한 육수로 취기를 씻어내며 아부다비의 밤을 달랬다. 다음 날 전시회 시작 시간이 늦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덕분에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날 밤은 아잔 소리도 듣지 못하고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전시장은 전날보다 더 진지한 비즈니스의 장으로 변했다. 주변 국가인 레바논,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온 바이어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 유독 말이 잘 통했던 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 ‘Al Hokair Group’의 바이어였다.
최근 개방의 바람이 불고 있는 사우디 시장에 대해 그들은 아주 실질적인 통찰을 들려주었다. 야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뜨거운 중동의 기후 특성상,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VR 콘텐츠는 그들에게 생존이자 필수적인 놀거리가 되리라는 점이었다. “사우디를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나오는 오아시스처럼 가상 세계로 만들겠다”는 우리의 제안에 그들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간 끝에, 다음 해 열릴 2020 두바이 엑스포를 겨냥해 협력에 박차를 가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고, MOU를 체결했다.
맙소사! 중동의 거대 자본, 이른바 ‘오일머니’와 파트너가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드디어 글로벌 시장의 큰 줄기 하나를 잡은 것 같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일정이 끝난 뒤,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외출했다. 양갈비 요리를 잘한다는 ‘아부샤크라’라는 식당을 찾았다.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사이즈의 양갈비를 뜯어먹으며 하루를 정리했다.
MOU 축하주를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여기는 이슬람의 나라다. 술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문득 어제 옥류관에서는 어떻게 술을 마실 수 있었나 싶었는데, 외국인 방문이 잦은 호텔 내 업장은 예외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냥 호텔에서 저녁을 먹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잠시 스쳤지만, 양갈비가 말도 안 되게 맛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중동이라는 시장은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열려 있었다. 내가 가졌던 선입견은 이미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다가오는 내년이, 그리고 그 다음이 유난히 기대되는 밤이었다.
다음편,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 틀린게 아니라 다른거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