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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철 Jun 23. 2022

짧은 생각

단상 #1

 여름 실종

머리 위로 햇살이 따갑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음을 깨닫는 순간은 버스 정류장에 서서 아스팔트 위를 쓸고 오는 습하고 더운 바람을 맞을 때이다. 서울에서 삼십 년을 살다 보니 도로 위를 정신없이 달리는 차들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계절의 변화를 감촉하는 일은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오히려 이 생활이 정상인지 의심해 보는 일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해 문이 열리면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방금까지 먼 끝을 바라보던 나는 사람들 뒤에 붙어 시원한 버스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버스 안에 자리를 잡고 버스의 냉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당겨 닫는다. 차창 밖은 어디에도 여름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찌르는 매미소리 아래 멱감는 아이들 소리에 대한 추억은 다음 정거장에 내리기 위해 벨을 누름과 동시에 사라진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스팔트 위의 열기로 여름은 증발되었다.    



 

단상 #2   

 회상

사람에게는 까마득히 잊고 지낸 추억을 소환하는 뭐랄까 마음의 스위치 같은 것이 존재한다. 추억의 상자를 여는 열쇠라고도 생각해 보았는데 음악을 통해 떠오르는 추억은 너무도 찰나와 같아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다. 존 레논의 ’woman’을 들으면 내 마음은 갑자기 불을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제주도의 검은 돌 해변 곁을 떠도는 바람소리에 속이 울렁거린다. 정말 가슴속에 바람이 들락거리는 것 같다. 머릿속을 꽉 채운 존 레논의 음성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제주의 길을 자전거로 달릴 때의 추억이 그의 음성에 달라붙어있는 것이다. 존 레논의 노랫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의 고독한 음색이 내 가슴에 들어와 내 속을 메슥거리게 한다.

회상하는 일은 가끔 웃음 짓고 대부분 울적하다. 좋은 추억도 나쁜 기억도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필름 카메라로 인화한 사진첩을 넘길 때마다 더디게 크던 아들은 어느새 사진첩에서 사라져 내 핸드폰에 성인으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방금 기차를 타고 제 갈 길로 갔다. 나의 절친은 술을 마시면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 밤늦은 교실에서 나에게 ‘비와 찻잔’을 불러준다. 그 교실에서 친구가 부른 그 노래가 우리 둘을 이어주고 있는 사건이다. 친구는 자신의 노래에 감탄하며 선망한 나에게서 자신의 소년을 만나는 것이다.



     

단상 #3

   여름 사건

새로 난 길이란 뜻의 신작로를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국민학교가 있었다. 학교는 농사 지을 때 쓸 물이 강물처럼 흐르는 농수로를 지나야 했다. 강물 위로 다리가 있었고 여름이면 그 다리 위에서 아이들은 강물로 뛰어내리며 놀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강물에서 멱을 감다 아이들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내 국민학교 친구 하나도 여름 거의 끝무렵에 그만 목숨을 잃었다.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의 햇살 아래 강물은 더욱 영롱해 보이고 흐르는 물소리는 청량했지만 차마 뛰어들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 걸리면 그야말로 허벅지가 부러지게 맞았기 때문이다. 강물에서 논으로 물이 흐르는 길목에는 십자형의 수로가 있었다. 그곳은 우리에게는 조금 큰 목욕탕 정도의 크기였고 깊지도 않아서 죽을 염려도 없었다. 여름방학이 막 끝났을 무렵 더위는 크게 꺾이지 않아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 몇몇 이서 조금만 놀다 가자고 작당을 했다. 멱을 감으며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논과 논 사이로 퍼졌다. 그때 농수로를 따라 집에 가던 키 작은 금순이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다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그날 밤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서 허벅지가 불이 나게 맞을 일에 잠이 오지 않았다. 두려움에 학교에도 가지 않을 뻔했다. 다행히 금순이가 선생님에게 고자질하지는 않았지만 지난밤 가슴 졸인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몇 년 전 금순이를 만났다. 농수로 위에서 작은 키에 이르겠다고 야무지게 겁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화가 나는 대신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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