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집에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그 어느 날은 까치산 전철역 바로 옆에 빌딩의 준공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가 우여곡절 끝에 이 빌딩을 준공하였고 준공식을 준비하기 위해 직원들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개업식에 화분 보내는 일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침부터 준공식을 기념하는 화분들이 밀려들어 건물 입구와 복도를 가득 채웠다. 거의 말단이었던 나는 계속 배달되어 오는 화분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크고 육중한 화분에 키 큰 해피트리 나 고무나무들은 보기에도 별로였는데 적당한 자리를 잡아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팀에 이 일을 거들어줄 내 아래 직원은 팔다리 가느다란 여자뿐이었으니 화분 배치는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내 일이 되어 있었다. 행사를 마친 후 화분들의 운명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대부분은 햇빛도 공기도 통하지 않는 복도에서 말라죽거나 빌딩 입구에서 좋은 공기 마시다 말라죽었다. 그중 값이 좀 나가는 난 종류는 누군가의 승용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서 또 조용히 말라죽었다.
준공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내 차 안에 조그만 화분 하나가 실려 있었다. 나무 이름은 ‘서황금’이었다. 관음죽의 일종으로 ‘무늬관음죽’이라고도 한다. 이 화분이 내가 집에서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첫 화분이나 다름없다. 이 서황금의 운명은 그날 준공기념의 다른 화분들과 달랐다. 내 집 거실에 자리를 잡은 이 서황금은 10년을 살다가 말라죽지 않고 화분 대신에 땅에 심었다. 이사를 할 때 이삿짐센터에서는 화분이 몇 개가 있는지 세어보고 견적을 한다. 나와 아내는 볼품없는 화분 몇 개를 정리하고 이 서황금만은 가지고 이사하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이사해야 할 때쯤에는 이 화분을 가지고 가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6년이 지나니 잎도 줄기도 죽다 살기를 반복해 약해지고 볼품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같이 지낸 세월이 있어서인지 다시 이삿짐 트럭에 실었다. 어느 날은 나무에 병이 들어 하얀 진딧물이 잎과 줄기를 뒤덮었다. 이번에는 이 녀석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잎을 모두 잘라낸 다음 진딧물 약을 듬뿍 주고 베란다 바람 통하는 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한 달 이상을 쳐다보지도 내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다 죽은 나무에서 여리고 초록한 새잎을 돋아나고 있었다. 아마 그날 나는 이 화분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요즘은 집에서 가꾸는 화분이 수십 개다. 대부분 야생초나 야생화이고 나무는 한두 개 정도이다. 나와 작별한 서황금 이후에 들여온 서황금이 베란다에서 3년 이상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녀석도 십 년 이상은 끄떡없을 것 같다. 베란다에서 오래 장수하는 식물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한 해를 넘겨 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지난겨울을 치열하게 보낸 이 식물들에서 봄의 기운을 가장 먼저 느낀다. 긴 겨울을 지내다 보면 감탄할 일이 적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지 탄성을 지르는 일에 무뎌진 것이지 아리송하다. 감탄이 없는 세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어느새 3월 중순을 향해 가는 오늘 그 지루함 끝에 감탄이 왔다. 베란다에서 겨울을 보낸 화분들이 새순을 움터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디어 가던 만병초에서 두 개, 다 죽었다고 허리를 잘랐던 자엽아카시아에서 네 줄기, 꽃이 잎이 되어버린 수국 밑으로 엄지손톱 같은 수국, 하얀 꽃에 반했던 치자나무에 나비 같은 잎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모두 봄을 맞이하는데 황금담쟁이만은 시계가 거꾸로 흐르듯 아직 단풍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끝내 겨울을 이기지 못한 식물은 화분만 남겨두었다. 겨우내 철을 모르고 계속 꽃을 피우는 화분도 있다. 거실에 둔 화분은 철을 모르고 꽃을 피운다. 미안할 정도로 계속 꽃을 피운다. 우이엽과 땅콩사랑초에서 계속 올라오는 꽃대를 보고 마냥 좋아하다 보면 염치가 없어진다.
씨앗이 움트고 꽃이나 나무로 자라나는 화분을 집에 두고 보살피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단순하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생채기 내는 생명을 보살피는 일은 없다. 가족은 예외이다. 가족도 가족 나름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가족은 어지간해서는 보살핀다. 보살피는 일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야생화 화분이 집에 들어올 때는 곱디고운 새색시 같다. 어느 날은 너무나도 곱고 예뻐서 밤중에 일어나면 베란다로 나가 새로 들어온 화분을 지켜본다. 한 달 전 보랏빛 꽃이 주렁주렁 엉겨있던 보라싸리가 지금은 헝클어진 잎만 남아 한구석에 밀려나 있다. 식물도 꽃을 피워야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 꽃에 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식물을 기르며 가장 어려운 일이 물 주기이다. 물을 조금 주면 마르고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식물은 그렇지 않아 물을 주는데 애를 먹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주고 이주가 다 되어 주기도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물을 주다가 화분 하나하나를 살피게 된다. 나무젓가락 꽂아 화분의 습도를 알아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겉흙의 수분을 재어도 본다. 그리 애지중지하다가도 나의 외도가 길어지면 화분은 잎을 늘어뜨리고 넋을 놓는다. 잎이 늘어진 화분을 보고서야 물을 주고 환기를 시켜주면 다음 날 잎은 다시 꼿꼿하게 일어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렇게 화분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일이 나는 즐겁다.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한다. 그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인간관계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화분의 잎이 한순간 늘어지는 것처럼 관계도 소원해지면 시들해진다. 이럴 때 화분에 물을 주듯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 때로는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결국 빈 화분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화분에 물을 주듯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아무 생각 없이 너무 자주 주는 물은 뿌리를 썩게 할 뿐이다. 나는 아들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물을 주었다. 아들을 믿고 묵묵히 지켜보는 일이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누군가를 말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는 일을 식물을 보살피며 배운다. 겨울을 보낸 베란다의 화분들은 나의 기다림에 움트는 새잎으로 화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