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깨고 잠들고를 반복하다가 아침이 되었다. 핸드폰을 더듬거리며 시계를 보니 앨리스 사장님 부재중이 떠있었다. 몸이 괜찮은지에 대한 연락이었는데 일찍 잠들어 받지 못하였다. 저녁 10시부터 잠들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렇게 오랜시간 잠들어 있던것도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근 3일간 쉬지 않고 돌아다닌 날들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어제보다 나아진 컨디션으로 아침을 먹기 위해 조식 룸으로 갔다. 이 조식은 이 숙소의 가장 큰 매력이다.
"속은 좀 괜찮아요?, 어제 너무 늦게 확인해서 손을 못 따줬네요."
"어제보단 좀 나은 것 같아요!ㅠㅠ, 뭘 먹고 체한진 모르겠지만 먹는 걸 조심해야겠어요."
"어제 혹시 막걸리 마셨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제주도 와서 막걸리 마시 엄청 크게 체한 적 있거든요~ 그 뒤로는 안 먹어요."
어제 체한 이유가 막걸리 때문이었다니!!! 막걸리 먹고 체한다는게 이런거구나...제주도 막걸리는 나랑 안 맞나 보다. 또 체하지 않기 위해 빵과 샐러드를 꼭꼭 씹어 천천히 먹고 있는 중, 앨리스 사장님이 오늘 금오름 근처에서 미팅이 있는데, 가고 싶으면 태워다 줄 수 있다며 갈 것인지 물었다. 컨디션이 온전히 좋지 못해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갈까 말까 고민될 때의 답은 '가자'이다.
앞방 동생과 함께 사장님의 차를 타고 금오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역시나 옳았다. 금오름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하늘이, 기분이 좋았다.탄성이 절로 나오는 날씨었다. 앨리스 사장님이 주차장 입구까지 내려다 주셨고, 올라갈 때 비포장길과, 포장길 두 갈래가 나오는데 꼭! 비포장길인 숲 속 길로 걷는 것을 추천해주셨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면 오름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둘레길만 돌게될테니 잘 찾아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차에 내려서 올라간지 얼마되지 않아 사장님 말대로 두갈래 길이 나타났다. 이정표가 제대로 없어 이 길이 맞는지가 의문이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이 길이 맞는 걸까요?"
"맞겠죠...?, 뭐 어때, 아니면 다시 내려오면 되니까요!"
표지판 하나와, 사람들의 발자국이 만들어놓은 길만이 이정표가 되어 긴가민가하며 오르던 중, 통나무로 만든 계단길을 보고 제대로 온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걸으며 왜 숲 속 길로 걸으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숲과 산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경이롭고, 들뜬 마음을 차분하고 숙연하게 만든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잘 정돈된 길이 아닌, 사람들이 지나다닌 발자국이 만든 길이 재미있었다. 그 발자국들이 길이 되어 만들어진 통나무 길, 나무들 틈 사이로 보이는 마을과 산의 능성들, 그리고 하늘, 구름 사이로 보이는 햇빛의 풍경들이 장관이었다. 어떻게 이 길로 올라갈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이 길을 알았을까? 누군가 금오름에 간다면 꼭 얘기해주고 싶다. 숲 속 길로 걸으며 숲을 느껴보라고.
너어어무 좋다!
금오름은 분화구는 물이 고여있는 날이 많아 한라산의 백록담을 연상시켜 '작은 백록담'이라는 귀여운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메말라 있었지만 그 자체로도 멋지고 훌륭했다. 어쩐일로 제주스러운 바람이 불지 않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잔잔한 바람에 억새만 조용히 흔들릴 뿐이었다. 이 잔잔한 고요함이 좋다.
오름 주변을 둘러보다가 분화구 안쪽까지 걸었다. (다른 오름들과 다르게 분화구 아래까지 내려가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에는 작은 웅덩이 인 줄만 알았는데, '웅덩이'라고 하기에는 생각보다 크기가 커서 놀랐다. 이 정도면 저수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못 까지는 될 것 같다. 그리고 말똥 냄새로 가득했다. 마스크를 뚫고,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말똥 냄새는...(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날씨가 햇볕이 났다가 흐렸다를 반복했는데, 이 현상을 앨리스 사장님은 '햇볕이 머문다'라고 표현을 하셨다.(표현이 예쁘고 좋았다.) 이상한 날씨 었지만 그마저도 마냥 좋았다. 햇볕이 머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때다!' 하고 카메라 버튼을 눌러 댔으니 무엇을 찍어도 잘 나온다.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이 맞냐는 듯, 언제 아팠냐는 듯, 마냥 좋아서 걸었다.
오름 절반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풀숲으로 뛰어든 어떤 덩치 있는 형체에 놀라 그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가까이 갔는데... 사슴이었다! 사슴이라니!? 오름은 정말 많은 자연을 품고 있구나. 이렇게 야생동물을 눈앞에서 본 것이 처음이라 놀랍고 신기했다. 마침 주변에 둘 뿐이라서 보물이나 비밀을 발견한듯이 숨죽여 기뻐했다. 혹여라도 누가 볼새라, 사슴의 만찬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한참을 조용히 구경하다가 우리도 배가 고파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먹고 싶은 것이 딱히 생각나지 않을 때, 입맛이 없을 때, 그렇지만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을 때 가는 식당이 있다. 바로 '호탕'이다. 앨리스 사장님의 남편분이 운영하시는 이 가게는 절대 실패할 일 없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호탕 사장님은 본래 서울 홍대 거리에서 포차를 운영하셨다가 몇 년 전 제주에 와서 이 가게를 차리셨다고 하셨는데, 어쩐지 내공이 상당했다. 호탕이라는 이름은 '좋을 호(好)+끓일 탕(湯)' 자를 써서, 호탕에 와서 음식을 먹는 손님마다 좋은 기운을 먹고 갔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지으셨다고 한다.(너무 좋다!) 그래서일까? 양지 탕면 한 그릇을 뚝닥 비워 내고 나니 아픈 것이 싹 없어졌다. 사장님은 어제 체해서 아팠던 사람 맞냐며, 아픈 사람이 국물까지 싹 비워냈다고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렇지만.... 너무 맛있는걸요?). 아, 또 먹고 싶다. 여행이 끝나고 육지에 가면 가장 생각날 음식이 바로 이 양지 탕면이다.
든든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옆 제레미 커피에 가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했다. 이제 이건 코스가 된 것 같다. 호탕-> 제레미 이건 애월 여행의 룰로 정해놔야 한다. 배부름에 해안도로를 좀 걸어볼까 하였지만 체력과 컨디션을 핑계로 앨리스 사장님의 차를 얻어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테이크 아웃한 제레미 블랜드와 어제 사놓고 체해서 먹지 못한 본조르노 빵과 함께 티타임(이라고 쓰고 2차 먹부림이다.)을 가진 뒤, 엄마와 짧은 통화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어제의 밀린 일기와 오늘의 일기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저녁은 배가 고팠지만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편한 속을 위해 굶기로 했다. 전기장판에 엎드려 종일 일기를 쓰고 있다. 어렸을 때 방학숙제로 밀린 일기를 쓰는 기분이다.
살면서 이렇게 일기를 열심히 써본 적이 없다. 일기를 쓸 때마다 왜 이렇게까지 일기를 쓰는지 항상 나에게 되묻는다. 짧게 쓸 수 있는데 이렇게 세세하고 구구절절하게 쓰냐고, (그러게?) 왜 이렇게 머리를 쥐어짜면서 쓰냐고.(그러게 말입니다.) 구태여 이유를 얘기하자면,,, 머리가 나빠서이다. 바로 쓰지 않으면 그날의 감정이나 상황이 휘발되어 잊어버리니까 세세하게 쓸수록, 세세하게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그 순간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오기를 부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미련과 집착 그 어디쯤이랄까, 30일 동안 차곡히 쌓인 이 기록들이 뿌듯하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금오름-> 호탕 -> 제레미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