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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I

2-7(完). 지정학적 리스크와 AI의 미래

패권 경쟁, 거버넌스, 그리고 인간의 역할

by 유비관우자앙비
"AI는 더 이상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권력에 가까운 무언가다."

2025년 다보스포럼에서 여러 연설과 토론이 반복해서 던진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 전략이 된 AI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는 스타트업 혁신, 업무 자동화, 챗봇처럼 기업 단위의 생산성 도구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2024~2025년을 지나면서 AI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 AI는 데이터 주권과 개인정보 보호, 국방과 안보, 전력망과 에너지 인프라, 반도체 공급망, 금융 시스템과 결제 네트워크 같은 영역을 관통하는 국가 전략 자산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백악관 AI 전략과 국방·에너지 부처의 예산, 수출 통제를 묶어 "AI 경쟁력 = 국가 경쟁력"이라는 프레임을 굳혀가고 있습니다. 중국은 AI를 '신질생산력'으로 명시하면서 국가 주도로 데이터센터·반도체·전력 인프라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EU는 AI Act와 소버린 AI 논의를 통해 "주권을 가진 AI"를 만들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클라우드·반도체·플랫폼을 결합하는 후발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AI는 여전히 기업이 만들지만, 그 판을 그리고 규칙을 정하는 주체는 점점 더 "국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패권의 축: 칩, 데이터, 전력

칩(Compute) — 엔비디아와 파운드리의 병목


현재 고성능 AI 가속기 시장은 사실상 엔비디아가 주도하고 있고, 이 칩들을 실제로 생산하는 파운드리는 TSMC와 삼성 정도로 좁혀집니다. 여기에 HBM과 메모리는 삼성·SK하이닉스가, 제재 속에서도 자립을 시도하는 중국의 SMIC가 각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엔비디아·AMD·인텔 같은 설계 기업과 미국·일본·대만·한국 기업을 묶는 'Chip 4' 구도를 통해 첨단 공정 접근성을 사실상 동맹권으로 묶었습니다. 대만의 TSMC는 5나노 이하 파운드리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확보하며 지정학적 병목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칩을 가진 자가 AI를 만든다"는 말은 다소 과감하지만, 최신 LLM 경쟁이 고성능 칩과 첨단 공정 접근성에 의해 크게 좌우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현실을 꽤 잘 압축한 표현입니다.


데이터(Data Capital) — 국가마다 다른 데이터 헌법


국가별 데이터 구조는 AI의 성격에 그대로 영향을 줍니다. 미국은 거대한 민간 시장과 비교적 느슨한 규제에 기반한 상업 데이터 자본이 중심이고, 중국은 공공·민간 데이터를 국가가 통제하는 국가 통합형 데이터 구조를 지향합니다. EU는 GDPR을 축으로 "데이터 권리"를 우선하는 규제형 데이터 구조를 만들고 있고, 한국·일본은 의료·제조·금융 등 일부 산업에서 도메인 특화 데이터를 강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AI 모델의 품질이 단순히 파라미터 수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지만, 각국이 어떤 데이터 구조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AI가 반영하는 세계관과 편향, 강점이 달라지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전력(Energy Infrastructure) — AI의 숨은 병목

AI는 전기를 많이 씁니다. 아주 많이 씁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는 2024년 전 세계 전력 사용량의 약 1.5% 수준(415TWh)에서 2030년에는 2배 이상 증가해 약 945TWh에 이를 수 있고, 이는 일본 한 나라의 연간 전력 소비에 근접하는 규모입니다. 여러 리포트는 같은 기간 데이터센터가 전 세계 전력 소비의 약 3% 안팎을 차지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개별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를 기준으로 보면, 중형 도시에 가까운 전력을 사용하는 사례도 실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국가는 이미 전력망 부담을 이유로 신규 데이터센터 인허가를 제한하거나, 재생에너지 연계·열 회수 의무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이 틈을 파고들어, 블랙록, KKR, 브룩필드 같은 글로벌 인프라 자본은 발전소·전력망·데이터센터를 하나의 체인으로 묶어 투자하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전력 → 데이터센터 → AI"를 하나의 인프라 자산 클래스로 바라보며 장기 자본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칩, 데이터, 전력. 이 세 축이 앞으로 AI 패권 경쟁의 기본 좌표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거버넌스의 위기: 기술보다 제도가 느립니다

AI 거버넌스에서 드러나는 핵심 리스크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블랙박스 모델


GPT-4 이후 상용 대규모 모델들은 구체적인 구조와 파라미터, 학습 데이터 구성이 공개되지 않습니다. 연구자들은 입력과 출력의 패턴을 분석해 내부 작동을 "추론"할 수 있을 뿐, 특정 답이 왜 나왔는지 단계별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명가능성(XAI)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실제 상용 LLM에 대해 "왜 이 답을 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즉, 현재의 상용 초거대 모델은 부분적으로만 이해 가능한 블랙박스에 가깝습니다.


국경을 넘는 플랫폼과 규제의 간극


OpenAI, Google, Anthropic 같은 기업들은 API와 클라우드를 통해 사실상 국경을 넘어 AI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각국은 AI Act, 행정명령, 서비스 차단, 데이터 로컬라이제이션 같은 수단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국가 단위 규제가 글로벌 플랫폼을 세밀하게 통제하려 할수록 규제의 비용과 복잡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통제 불가능"이라기보다, 통제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정치·경제적 비용이 매우 커진 상태에 가깝습니다.


데이터 불균형과 착취 위험


고성능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대한 텍스트·이미지·음성·행동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작권, 개인정보, 지역별 데이터 주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힙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소규모 시장의 데이터가 충분한 보상·투명한 합의 없이 글로벌 상업 모델에 흡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학계와 국제기구 일부는 이를 "데이터 식민주의"라고 부르며, 데이터 소유권·이익 공유·로컬 거버넌스 규범 마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보 환경


생성형 AI는 딥페이크, 자동화된 프로파간다, 초개인화된 정치 광고를 사실상 "낮은 비용으로 무한히" 생산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2024년 다수 국가 선거를 분석한 연구와 정책 보고서는, 현재까지 "AI 때문에 선거 결과가 직접적으로 뒤집힌" 사례는 제한적이지만, 허위 정보의 생산 비용을 크게 낮추고 사실·거짓의 경계를 흐리며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잠식하는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특정 후보의 발언을 조작한 음성·영상, 자동화된 챗봇을 통한 표적 정치 메시지는 규제·플랫폼 정책만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됩니다. 문제는 기술 자체라기보다, 이 기술을 누가 어떤 규칙 아래에서 사용하도록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와 합의의 부재입니다.


AI는 인간의 사고 습관을 바꾸고 있습니다


지금의 생성형 AI는 글을 대신 써주고, 회의를 대신 기록하고, 메일을 대신 요약해줍니다. 많은 지식 노동자에게서 이런 패턴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더 자주 "AI에게 요약을 부탁"하고, 아이디어의 초안을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AI에게 먼저 던져본 뒤 수정"하고, 자료 구조를 먼저 잡기보다 "AI에게 목차를 받아" 그 위에 살을 붙입니다. 즉, 인간은 점점 사고의 생산자라기보다, AI가 생산한 사고를 검수·선별하는 존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HCI·미디어 연구들은 추천 시스템과 자동완성이 사용자의 판단 기준을 바꾸고, 스스로 사고하기보다는 시스템이 제시한 옵션을 검수·조정하는 형태로 역할이 이동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AI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생각을 대신해 주는 도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출발점을 외주 주는 습관"을 들이기 쉽습니다. 이 변화가 장기적으로 인간의 인지 능력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논의와 연구가 쌓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의 위치를 조금 냉정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초 모델·초거대 컴퓨팅 경쟁에서는 미국·중국·일부 유럽에 비해 뒤처져 있습니다. 반도체 생산 능력은 세계 최상위지만, 자국 내 초대형 AI 슈퍼컴퓨터·전력망 여유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입니다.


산업별로는 의료 영상, 일부 제조 공정, 콘텐츠 IP, 방산 등에서 의미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AI 스타트업이 자체 GPU 클러스터보다는 해외 클라우드, 외산 LLM API에 의존하는 구조입니다. 공공 데이터의 품질은 높은 편이지만, 개방·표준화·활용 측면에서는 여전히 과제가 많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AI 전략은 "우리도 GPT를 만들자" 같은 단일한 슬로건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의료에서는 루닛·뷰노처럼 도메인 특화 데이터와 규제·임상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글로벌 니치 톱을 노릴 수 있고, 제조에서는 조선·반도체·철강 같은 고난도 공정에서 산업용 AI를 고도화할 여지가 있습니다.


콘텐츠에서는 K-팝·드라마·웹툰·게임 등 IP를 다국어 더빙·버추얼 휴먼·팬덤 분석 AI와 결합하는 전략이 유효할 수 있고, 국방에서는 데이터 접근과 보안 특성상 자국 중심의 폐쇄형 생태계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금융과 공공 영역에서는 글로벌 LLM과 국산 모델을 혼합해 쓰는 혼합 전략(hybrid strategy)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기초 모델을 전부 직접 만들 수 없다면, 적어도 어떤 모델을 어디까지, 어떤 규칙과 데이터로 쓸 것인지는 우리가 스스로 설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국가·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AI가 모든 산업과 일상을 재편하는 시대에, 결국 남는 질문은 "AI가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AI와 함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질문을 설계하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답을 잘 찾는 능력보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정의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집니다. 맥락과 판단이 필요합니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하지만, 그 데이터를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윤리·관계·책임이 걸린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의미를 설계하는 역할이 남습니다. 무엇을 최적화할지, 어떤 것을 목표로 삼을지, 어떤 결과를 "좋은 결과"로 볼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역할입니다.


기업의 수준에서

어떤 업무를 AI에게 위임할 것인지, 어떤 데이터는 절대 외부 모델에 노출하지 않을 것인지, 어떤 영역에서 자체 모델·자체 인프라를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조직 차원의 원칙과 아키텍처를 설계해야 합니다. "AI를 쓴다"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AI가 들어갈 자리는 어디이며, 그 자리를 설계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먼저 정해야 합니다.


국가의 수준에서

칩·데이터·전력이라는 세 축 중, 어디에 전략적 자원을 배분할지에 대한 장기 계획이 필요합니다. 소버린 AI와 글로벌 모델 활용 사이의 균형, 교육·복지·노동 정책을 AI 시대에 맞게 재설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규제는 속도를 늦추는 장치가 아니라, 속도를 유지해도 괜찮은 방향으로 레일을 깔아 두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결론: 세상을 다시 쓰고 있는 AI, 문장은 누구의 손에서 완성되는가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순서대로 살펴봤습니다.


데이터와 컴퓨팅이 만들어낸 새로운 경제 설계도, 칩 패권과 반도체 공급망, 클라우드 빅3와 GPU 전쟁, 전력과 에너지·데이터 주권의 문제, 소프트웨어와 생산성 도구의 재편, 산업별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AI 침투,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정학·거버넌스·인간의 역할까지.


정리하면, AI는 더 이상 "하나의 기술"이 아닙니다. AI는 권력이고, 구조이고, 앞으로 펼쳐질 문명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문명은 저절로 쓰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방향을 정하고, 규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이익을 가져갑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이렇게 수렴됩니다.


AI는 누가 만들고, 누가 통제하며, 누가 그 혜택과 위험을 나눠 가지는가.

국가·기업·개인은 각자의 수준에서 이 질문에 대한 자기 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규제, 투자, 조직 문화, 개인의 역량과 습관이 결국 "우리가 얼마나 그 펜을 함께 쥘 수 있는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AI가 세상을 다시 쓰고 있는 지금, 문장의 초안은 어쩌면 이미 실리콘밸리와 몇몇 수도에서 작성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 문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고쳐 쓸 것인지는 우리 각자가 결정해야 합니다.


이 시리즈가, 그 선택을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는 데 작은 참고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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