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이 타인의 투쟁이 되는 순간에 관한 소고.
삭발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행위이다. 효경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라는 말처럼, 효를 행하는 첫번째가 바로 모발을 잘 간수하는 것이라는 깊은 유교 사상의 영향일 수도 있다. 이렇게 중요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행위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큰 의미를 갖는다.
효경의 문구 중 ‘불감훼상’은 감히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감히”라는 말은 위협적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만으로도 불효가 행해진다는 이 사상의 “조선”시대를 지나 치욕스런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서도 모발에 대한 문화적 집착은 변하지 않았다.
요새 많은 정치인들이 머리를 민다. 삭발이라는 행위의 정통성과 의미를 볼 때에 이들이 얼마나 큰 결심과 의지를 내비치는지는 잘 알겠다. "희소한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치의 사전적 의미에 맞게끔, 본인이 대표하는 이익 집단을 대변하는 의지와 입장을 "민주주의"적으로 내비치는 방법일 것이다. 다만, 삭발이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일주일에 두 세번씩은 크나큰 결단을 하는 것인지라. 삭발이 이렇게 쓰이는 것에 반대한다.
머리에 칼을 댄지 어언 7년. 첫 삭발은 3mm 바리깡으로 시작했다. 바리깡을 사서 집에서 셀프 삭발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원빈이 <아저씨>에서 삭발을 해서 비참한 기분도 느꼈다. 오징어 확인 사살이랄까. 어느새 바리깡의 헤드는 부러졌고, 그냥 면도칼로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귀를 베어본 적도 있고, 여드름을 베어내서 피칠갑을 한 적도 있다. 쉐이빙폼을 턱부터 정수리까지 발라 뜨거운 물에 면도기를 휘적이며 맞이하는 아침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삭발은 그러한 것이다. 모발의 부분적 부재를 전체적 부재로 맞이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큰 결단이며, 동그란 두상을 맞이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사회적 투쟁의 도구로 활용된다면, 우리 민머리들의 스탠스는 모호해진다.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산에 나무를 많이 심는다. 유전자 혹은 스트레스의 작용으로 맨들맨들해진 머리에서 분출되는 땀은 거침없이 이마로, 뒤통수로 내려온다. 모발(=민둥산의 묘목과 같은)이라는 완충 장치를 갖은 자들의 삭발은 이런 어려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행위이다. 패션 대머리도 있지만, 아무튼 삭발의 정치화는 좀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의료적 행위이고 누군가에게는 미용적 행위일 삭발이 매스컴에서는 개그의 소재이거나, 정치적 소재로 소모된다. 모낭에 머리카락이 3,4개씩 자라는 자들의 삭발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진다.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투쟁의 방식이라면 나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인가. 물론 인생이란, 토마스 홉스 아재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했듯이, 매일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어제 황교안 대표의 삭발은 동지일 줄 알았던 이의 배신으로 더 뼈아팠다ㅋ 빽빽하더라, 부럽더라. 아무튼 뭐 그렇다구. 가만히 있는 민머리들의 감성 자극 보다는 다른 표현 방식을 찾아주면 좋겠다. 천만 탈모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