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아일랜드 우당탕탕 가족 여행 이야기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 우리 부부는 이 날 결혼을 했고, 축복의 비는 결혼식 날부터 시작해서 결혼생활 내내 '주구장창' 우리의 여행을 따라다니며 아낌없이 내려주었다.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며 떠났던 봄철의 여행에서 맑은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잿빛으로 얼굴을 바꾸었고, 우리가 가는 길 앞에서 잿빛 구름을 성큼성큼 몰고 오며 시원하게 비를 뿌려주고는 했다.
이번 하와이 여행은 다르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기 전부터 날씨 어플에서 계속된 새로고침을 눌러댔다. 우리의 여행기간에는 쨍한 햇빛이 비추기를 바라며 실눈을 뜨고 결과를 살폈다.
여행 삼 일 전, 이틀 전, 조금씩 걷히는 듯한 구름. 하루 전. 예스! 우리가 가기 전 하와이에 연이는 비가 계속되는 소식에 조마조마했는데, 천만 다행히도 우리의 여행기간에는 비 소식이 없었고 심지어 쨍한 햇빛 아이콘까지 몇 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의 날씨면 충분했다. 행복회로를 돌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하와이의 날씨는, 그것도 빅아일랜드의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는 심한 변덕꾸러기라는 것을.
2월 빅아일랜드는 우리가 도착했던 첫날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맑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다. 날씨 어플의 소식에는 계속된 비 소식으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비가 올 확률 80% 이상. 그것도 여행 내내. 그렇게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도 어김없이 촉촉한 비를 듬뿍 맞으며 다녀야 했다. 뭐 으레 그랬으니까, 제발 하루만 하루만 바라면서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 아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땅에서 솟구치는 물까지 겹쳐졌다. 마음은 이미 바닷속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문제의 시작은 싱크대였다. 빅아일랜드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우리 숙소의 음식물 쓰레기는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음식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우선 크린랩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의 행방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가운데, 설거지를 하며 눈에 들어왔던 배수구 구멍이 어딘가 낯익었다. 음식물 분쇄기가 설치된 듯한 느낌으로 십자 모양으로 뚫려있는 검은색 투입구였다. 이게 맞다면 발판 어딘가쯤에 작동하는 버튼이 있을 텐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벽 한쪽에 검은 스위치를 발견했다. 혹시나 싶어 살짝 올려보았는데, 드르륵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유레카! 하와이 숙소는 분쇄기를 사용해서 음식물을 처리하는구나! 어머님댁에서 몇 번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따로 분리배출을 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위생적일 것 같았다. 그렇게 밥이나 반찬 따위의 남은 음식물이 조금씩 더 나올 때마다 드르륵드르륵 갈아댔다. 남은 밥이나 반찬도, 망고 껍질도. 앞으로의 하와이 주방은 조금 더 쾌적할 것 같았다.
그 예감이 틀렸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메, 이거 막혔나 보다. 어쩌면 좋데?"
어머님이었다. 둘째의 성화에 못 이겨 샀던 수박을 우리는 가득 먹었고, 그 껍질이 봉지에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는데, 이 분쇄기의 존재를 안 어머님이 수박 껍질을 넣고 드르륵드르륵 거침없이 갈아버리셨던 것이다. 차마 이렇게 크고 단단한 음식물까지 넣지 못했던 나와는 달리, 한국 음식물 분쇄기의 튼튼한 성능을 생각하며 싱크대 구멍에 쏙쏙 넣으셨던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싱크대는 토를 하듯 까만 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쿨럭. 모두 경악을 했고, 잠시 싱크대 사용을 중단한 채 '이제야' 호스트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싱크대가 역류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스트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답장을 주었고, 더 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다음 날 배관공을 보내 수리를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말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단단하고 질긴 음식물을 넣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음식물은 쓰레기통에 따로 버려주세요."
아차. 하와이 음식물 처리기는 모든 걸 갈아버릴 것만 같은 한국의 음식물 분쇄기와는 달랐던 것이다. 아주 소량의 음식물 찌꺼기 정도만 갈아내는 정도의 역할을 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바탕의 소동을 겪어내며 우리는 하와이에서 음식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음식물 분쇄기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배웠다. 또 이렇게 우리처럼 '싱크대' 소동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다음 날 호스트에게 받은 메시지는 이러했다.
배관공이 오늘 음식물 분쇄기를 교체했습니다.
음식물 분쇄기에 있던 음식이 뚜껑을 파손시켜 물이 새었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쓰레기통에 버려 주세요.
인신키네이터(분쇄기)는 상업용 주방 기기와 달리
단단하고 견고하거나 큰 음식물 찌꺼기를 강력하게 분쇄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피해야 하거나 주의해야 할 사항 요약
• 지방, 기름, 기름기(배수구가 막힐 수 있음)
• 큰 뼈 또는 매우 단단한 물체
• 섬유질(옥수수 껍질, 셀러리 줄기)
• 비식품물(플라스틱, 금속)
• 많은 양의 탄수화물 식품을 한 번에 넣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하게 머물다 가시길 바랍니다.
뼈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큰 수박 껍질을 몇 차례나 넣고 돌렸으니 버티지 못할 만했다. 어쨌든 호스트와 연결해 겨우 배관 수리를 마치기는 했지만 어딘가 찝찝함이 남았다. 수리 비용 때문이었다. 이 수리비를 퇴실할 때 우리가 부담해야 하나?
그날 밤 남편과 나는 숙소 매뉴얼을 뒤져 정독하기 시작했다. 매뉴얼은 두께가 거의 국어사전급으로 파일로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숙소 기물 파손에 대한 조항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몇 번을 뒤적거리며 찾은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Plumbing Issue Investigation and Responsibility Policy
"Except for major leak occurrences, all Apartment Owners are responsible for the investigation and repair of air conditioning condensate problems, water hammer, or plumbing related problems occurring within their own units."
주요 누수 사고를 제외하고, 모든 아파트 소유자(Owners)는 본인 세대 내에서 발생하는 에어컨 응축수 문제, 워터 해머(수격 현상), 또는 배관 관련 문제(plumbing related problems)를 찾아내고 수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조항만으로 보면 책임과 비용부담은 호스트가 하는 게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런 조항이 덧붙여 있었다.
"If it is determined that the problem was caused by the negligence or misuse of the occupant, guest, or tenant, the cost of investigation and repair shall be charged to the respective unit owner, who may then seek reimbursement from the responsible party."
"문제의 원인이 거주자, 게스트, 또는 세입자의 과실(negligence)이나 오용(misuse)으로 판명될 경우, 조사 및 수리에 드는 비용은 해당 유닛 소유자에게 청구되며, 소유자는 책임이 있는 당사자(게스트)에게 비용 상환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배관에 문제가 생겼을 때 1차적 책임은 호스트에게 있지만, 그 원인이 게스트의 부주의라면, 수리비라는 청구서는 결국 게스트의 몫이 된다는 것. 호스트는 수리라는 행정적 의무를 다하고, 게스트는 그 과실에 대한 비용을 책임지는 구조인 것이다.
하필 그 '부주의'의 증거물이 선명한 초록색 줄무늬의 수박 껍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과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눈치 보는 게스트'의 지위로 전락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숙소의 그 어떤 불편함 앞에서도 호스트에게 감히 입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