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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Feb 01. 2021

27. 엄마, 난 앤이 좋아요 <빨강 머리 앤>

- 책 모임《소녀들의 명작읽기》 이야기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 머리 앤"


 이 노랫말을 보면 자연스레 경쾌한 멜로디가 떠오른다. 따라라 따라라라 따라 라라라~♬ 멜로디를 따라 한 소녀가 숲길을 걸어간다. 빨간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린 주근깨 많은 소녀 앤 이다. <빨강 머리 앤>의 주인공 앤! 나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에 불이 탁 켜지는 기분이 든다. 앤처럼 두 팔을 쫙 벌리고 빙빙 돌아보고, 앤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시와 이야기를 낭독해본다. 앤이 했던 말들을 소리 내어 말해본다. 그러면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 밝아지고,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어릴 때 만난 이야기 속 인물, 빨강 머리 앤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나의 좋은 친구이다.


 앤은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 없이 자랐다. 하지만 슬픔과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특유의 상상력과 발랄함을 간직하며 건강하게 성장한다. 앤은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앤이 초록 지붕 집에서 매슈와 마릴라와 살게 된다. 이웃의 다이애나와 '마음의 친구'가 된다. 앤과 다른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은 읽을 때마다 감동을 준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배경으로 했다는 '에이번리 마을' 숲과 강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빨강 머리 앤>을 읽으면 내 몸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듯 상쾌해진다. 아이들에게 나의 친구 앤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빨강 머리 앤과의 만남을 나처럼 좋아할까? 기대하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눴다.   


 〈빨강 머리 앤〉은 1908년 미국에서 출간된 후에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등 10여 편의 속편이 나왔다. 책 모임에서는 더 모던에서 나온 한 권짜리 <빨강 머리 앤>을 읽었다. 책의 크기도, 디자인도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했다. 빨강 머리 앤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원화 그대로 넣은 것도 이 책의 큰 매력이다. 인물이나 배경을 독자 스스로 상상하는 재미가 덜할 수 있는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나 장소를 떠올리기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책을 받아본 아이는 "와, 예쁘다." 했고, 해맑게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아이는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 그림 보는 재미를 동시에 맛보았다.


 이 책에는 모두 38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편의 이야기가 길지 않고, 어려운 낱말도 거의 없어서 술술 읽힌다. 다만, 한 번에 읽기에는 분량이 많은 편이라 모임에서는 두 번에 나눠서 읽었다. 1~25회까지 읽고 책 모임, 26~38회까지 읽고 책 모임. 이렇게 두 번 만났다. 빨강 머리 앤 1회 모임에서는 앤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2회 모임에서는 성숙해지는 앤의 모습을 보며 '어른이 된다는 것'과 '실패와 도전의 의미'를 살폈다.


아이 책 모임_기다림이 중요해요.


 이제 몇 달 뒤면 13살, 6학년이 되는 소녀 네 명이 <빨강 머리 앤>을 읽고 카페에 모였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음료를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필통이 어디 있지?"

"테이블이 너무 멀다. 좀 밀자."

"음... 이거 시원하고 맛있다."

저희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떠든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반갑고 좋은지. 한껏 들떠 있다. 아이들과 모임 할 때는 이런 소란스러운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나 카페에서 모임을 하면 들뜬 아이들 목소리에 주변 소음까지 더해져서 진행자가 예민해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 준비한 질문을 모두 다뤄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통제하거나 재촉하다가 모임을  망친 적이 많다. 마음을 편히 먹고, 기다려줘야 하는데 그걸 자꾸 잊는다.


 조금 기다리면 맥락 없는 대화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든다. "자, 이제 빨강 머리 앤을 만나볼까?" 하니 아이들이 책을 펼치고, 발제문을 들여다본다. 아이들이 앤과 만날 준비가 된 것 같다. 준비한 질문을 하나씩 나눈다. 어떤 질문에는 오래 머물며 깊게 이야기 나누고, 어떤 질문은 가볍게 넘어가기도 한다. 어른인 내가 만든 질문이 아이들의 눈높이나 관심에 맞지 않을 때도 많다. 늘 경계하려고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어른의 생각이 질문에 듬뿍 들어가기도 한다. 책 모임을 오래 해보니 그런 질문에 아이들은 단답형 답으로 대응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움츠러들거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응, 그렇게 생각했구나."하고 말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면 된다. 우리에겐 나눌 질문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나도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 성장하는 거니까.


사랑스러운 소녀, 빨강 머리 앤


  "나는 앤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엄청 밝고, 어디서든 상상해요. 그러면 삶이 행복해질 거예요. 슬플 때 엄청 슬퍼하고, 좋을 때는 엄청 좋아하는 앤이 나는 좋아요. 숲이나 하천에 이름을 지어주잖아요. 멋져요!"

  아이는 앤에 대해 이야기하며 몸을 들썩이고, 두 팔을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 인물 중 하나를 골라 특징을 말해보자는 질문에 아이가 이토록 열렬히 답할 줄은 몰랐다. 기대 이상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앤의 매력 찾기 시합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상상을 많이 하는 게 앤의 매력이지. 힘든 일을 상상으로 이겨내잖아.", "정말 사람들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지. 나도 같이 상상하게 해. 전염되는 것 같아.",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 내니 같이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 이런 친구 곁에 있으면 나도 상상력이 커지고, 같이 놀면 재미나지." 했다.


  정말 앤은 밝고 긍정적이다. 힘든 일이 생기고,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게 될 때마다 상상하며 이겨낸다. 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에 '버드나무 연못', '제비꽃 골짜기', '연인의 오솔길'처럼 특별한 이름을 붙인다. 사람들이 평범하고 당연하게 바라보고 느끼는 것들을 앤은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앤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아름답고 특별하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감탄하는 앤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책 모임 아이들도 이런 앤을 마음에 쏙 들어했다. 앤의 길고 긴 수다, 앤이 실수로 다이애나에게 술을 먹게 하는 장면, 마릴라 아주머니가 앤을 이해하고 아끼게 되는 모습 등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 앤은 말 많이 하고, 명랑한 아이인데. 나이가 드니까 자신의 특징이 사라져요. 두 쪽이 넘어가도록 혼자 떠들던 아이인데, 여기서는 말이 짧아졌어요."

" 나이가 들면서 의젓해지는 건 좋은 건데, 앤 이야기 듣는 게 진짜 재미있었는데 말이 줄고, 연극하는 것도 줄어드니 걱정이 돼요."

" 어릴 때 상상하며 즐거워했던 것을 나이가 들어 직접 해보면 실망스러운 것도 많아요. 앤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2회 모임에서는 아이들이 앤의 변화를 발견하고 섭섭해했다. 열다섯 살이 된 앤은 키가 훌쩍 컸고, 말수가 줄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어린 앤은 상상하고, 연극하고, 마음껏 떠들던 아이였다. 열다섯 살이 된 앤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교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수가 줄어든다. 아이들은 이런 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앤을 아껴주던 매슈 아저씨가 죽고, 앤이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한 일을 얘기하며 마음 아파했다.


  나도, 아이들도 어린 시절의 상상 속에 머물러 살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놓인 현실을 인식하고,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 짓게 된다. 핑크빛 상상 속에서는 좋기만 했던 일도 막상 직접 해보려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기대했던 것과 달라 실망스럽다. 앤도 그랬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피게 됐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겨 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앤은 건강이 나빠진 마릴라 곁에 남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앤은 말수가 줄었지만 눈빛은 더욱 깊어졌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아이들은 이런 앤을 보면서 "앤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길버트와 앤의 감정이 점점 커지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하며 앤의 행복을 빌었다.


실패의 의미


 소녀 앤이 명랑하고 해맑다면 숙녀 앤은 차분하고 사려 깊다. 상상력과 천진난만함을 잃는 대신 신중함과 지혜를 얻은 것 같다.  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다. 에이버리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한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최선을 다 했지만 실패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앤은 친구 제인에게 "에이버리 장학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노력해서 이기는 것 못지않게, 노력했지만 실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p.489)라고 한다. 아이들과 이 말을 깊이 나누고 싶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하니 아이들은 제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풀어놓는다. 아이들은 "실패도 경험이 되니까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경험이 쌓이는 거예요.", "실패하는 것도 성공하는 것만큼 중요해요. 실패도 과정이에요. 실패를 많이 하면 예방접종 맞는 것처럼 더 큰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되기도 해요.", "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해보고, 시도해보는 게 중요해요.",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라면서 실패의 의미를 이해했다. 실제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앤처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잘 지는 것이, 실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잊어버린다. 아이들과 앤의 말을 함께 읽고, 그 뜻을 헤아리면서 실패의 의미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노력했지만 실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앤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빨강 머리 앤의 말 


  <빨강 머리 앤>으로 모임 할 때는 기억에 남는 문장 나누기를 꼭 해야 한다. 마음에 담아두고 자주 꺼내보고 싶은, 좋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 책 모임 아이들은 주로 앤이 한 말에서 찾았다. 돌아가며 자신이 밑줄 그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는데, 듣기에 참 좋았다. 앤의 말이 아이들의 말이 되고, 앤의 명랑함이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 잡는 것 같아서.


"아주머니, 있잖아요. 저는 이 길을 즐겁게 달리기로 마음먹었어요. 경험상 그래야겠다고 마음만 굳게 먹으면 즐겁지 않은 일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p.77)


"아, 모르세요,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제가 그 한계에 다다르면 제 실수도 끝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정말 위로가 돼요."(p.311)


"잘 모르겠어요.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예쁘고 소중한 생각들은 보석처럼 마음속에 담아두는 게 더 좋아요. 그런 생각들이 비웃음을 당하거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게 싫거든요."(p.439)


 <빨강 머리 앤>으로 책 모임을 하려고 질문을 많이 만들었지만, 막상 모임을 하니 질문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책 속에 나온 앤의 말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마음이 머문 문장들을 나누면서 다이애나와 앤의 우정, 매슈와 마릴라의 사랑, 앤의 성장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나는 앤이 좋아요!


 <빨강 머리 앤>으로 책 모임 한 뒤 아이는 빨강 머리 앤에 폭 빠졌다. 빨강 머리 앤에 관한 책과 물건을 모았다. 내가 "빨강 머리 앤이 왜 좋아?"하고 물으면 아이는 "밝잖아요! 상상도 잘하고."라고 답한다. 엄마 욕심에 빨강 머리 앤 10권짜리 책을 읽어보라 권하면 "난 앤 어릴 때가 더 좋아요." 하면서 당차게 거절한다. 사실 나도 숙녀 앤 보다 소녀 앤이 더 좋다. 상상 속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앤, 아주 작은 일에도 크게 감동하고 웃음 터트리는 앤. 그런 앤 옆에서 나도 떠들고 노래하고 싶다. 아이도 앤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앤의 밝음이 전염되는 것 같다면서.


  이제 빨강 머리 앤은 나의 친구이자 우리 아이의 친구이기도 하다. 나와 아이는 '빨강 머리 앤'이라는 공통분모를 하나 더 갖게 됐다. <빨강 머리 앤>을 꺼내 들고 아무 곳이나 펼치면 아이와 나는 언제든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앤이 길버트 머리에 석판을 내리칠 때"라고 말만 꺼내면 아이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초록 지붕 집이 난 마음에 들어."라고 운을 떼면 아이는 "맞아요. 빨간 지붕이었으면 이상했을 거야." 하고 말을 받는다. "책 모임 할 때  ○○는 왜 이 책에 3점(5점 만점)을 줬을까? 다른 친구들은 다 5점 줬는데." 하면 "자기가 비평가래요." 하며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엄마, 나한테는 이 책이 5점 만점에 10점이에요." 한다.   


  소녀를 거쳐 숙녀가 되고, 이제 중년 여성이 된 내게 빨강 머리 앤은 특별하다. 낭만과 상상과 감탄으로 넘쳐났던 나의 소녀 시절을 다시 만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빨강 머리 앤>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말이 나온다.


"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이 가득한 이상 세계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p.524)  


 매슈 아저씨가 죽고, 마릴라 아줌마는 건강이 나빠진다. 앤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초록 지붕 집에 남기로 한다. 하지만 절망하기보다는 다시금 힘을 내고, 꿈을 꾸겠노라 다짐한다.


 빨강 머리 앤이 그랬듯이 우리 아이의 몸도 마음도 성숙해가고, 소녀보다 숙녀라는 말이 어울리는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런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우리 아이가 고운 숙녀가 되더라도, 상상을 잊고 현실을 더 잘 알게 되더라도. 책장에 꽂힌 <빨강 머리 앤>을 보며 종종 삶의 모퉁이를 여행할 꿈을 꾸면 좋겠다. 나이 들어 주름 가득한 내 손을 잡고 “엄마, 나는 빨강 머리 앤이 좋아요.” 라며 길고 긴 수다를 떨어주면 좋겠다.


작은 아이는 빨강 머리 앤 책과 물건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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