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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꼬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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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May 15. 2019

색칠


2019년 4월 2일 낮.


내 그림은 늘 흑백이다. 연필로만 그릴뿐 색을 칠하지 않는다. 괜히 색을 칠했다가 망칠 것 같고, 칠하고 싶은 색이 생각이 안 나기도 한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지리산 둘레길, 강이 내다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는다. 꼬리는 그리고 싶던 그림이 있다고 한다. 거침없이 스케치를 하고 여러 색연필을 바꾸어가며 칠을 한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싶은 그림도, 떠오르는 색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누가 보고 있으면 그림을 못 그린다. 마음껏 실수할 수 없어 조바심이 난다. 멍하니 있는 사이 꼬리의 종이가 채워져 간다. 나도 꼬리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싶은데. 빼도 박도 못하고 머리를 팽팽 굴려본다. 지리산의 감각들을 떠올린다. 진한 벚꽃 향기, 비 오기 전날처럼 불던 강바람, 처음 듣는 높은 새소리, 발등을 살살 기어오르던 개미의 걸음.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강렬했던 감각은, 불을 끄고 누울 때까지 잡고 있던 꼬리의 손이었다. '난 변온동물이야.' 차갑다가도 만지작대면 금세 데워지던 뜨거운 손. 깍지 사이로 배어 나온 미한 땀. 꼬리와 손끝만 닿아도 귀 뒤까지 후끈 더워지던 때였으니까. 맞잡은 손을 그리기 시작한다. 꽃을 한 송이 쥐어 줄까. 길가에서 시선을 오래 잡아끌던 남보라 빛 들꽃으로. 색을 하나 칠하기 시작하니, 그 색과 어울리는 다른 색들이 생각난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조금씩 덧칠을 한다. 더 진해도 될까, 더 다양한 색을 써도 될까. 가지런하던 색연필들이 어질러진다. 조금 전 깎은 색연필이 또 뭉툭해진다. 시간이 멈춘 양 빠져들고 나니, 내 종이도 색으로 가득 찬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우리의 손잡음이 어설프듯, 그림도 어설퍼도 되지 않을까. 꼬리가 내 색들을 오래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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