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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Jun 17. 2020

찌찌는 지지가 아니야

찌찌순례 후기



천왕문 옆에는 알쏭달쏭한 사찰 출입 예절이 적혀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삼가 주세요’라는 문구였다. ‘노출이 심한 옷’의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나시나 레깅스를 입었을 때 종종 비슷한 말들을 들었다. 팬티 위에 레깅스까지 입고도 엉덩이를 가리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보면, ‘윤곽 노출’도 포함인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얼굴이나 종아리, 손가락 노출에는 관대했다. ‘노출이 심하다’라는 것은 부위가 아니라 면적을 말하는 걸까? 그럼 온몸을 가리고 젖꼭지만 내놓으면 괜찮은가? 아마 기절할 것 같은데.

노출의 기준만 헷갈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 문구에 대해 물으면, 절은 성스럽고 격식 있는 곳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절은 성스러운 곳이었지만, 그게 몸을 노출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성스러움과 격식을 위해 왜 노출금지라는 규칙이 따라야 할까? ‘몸’은 ‘성스러움’과 대조되는 걸까? 몸은 추한가? 몸의 어떤 부위는 특히 더 천박한가? 왜 몸을 드러냈을 때 성스러운 공간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걸까?

스님들이 수행하시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답변도 들었다. 이게 제일 이상했다. 스님들이 내 몸을 보고 당최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걸까? 이건 사실상 스님들을 돌려까기(?) 위한 고도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성범죄를 당했을 때, 피해자의 행실이나 옷차림을 묻곤 한다. 성범죄는 가해자 때문에 일어났지, 피해자의 옷차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수행에 곤란이 있다면 그것은 수행자의 문제다. 옷차림은 잘못이 없다.

생명평화대학의 신입생들 일부는 찌찌순례를 기획했다. 날도 더운데 홀딱 벗고 산책이나 하자는 취지였다. 포스터에는 웃통을 깐 마고 할미가 실상사를 품고 있는 그림을 넣었다. 마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SNS에 홍보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하동, 인천, 장수 등 멀리서 오고 싶다는 분들도 계셨다. 사찰 출입 예절에 동의하던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노출하지 말라니까 되려 반항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글쎄, 모든 순례가 그렇듯 찌찌순례도 싸우자는 뜻은 아니었다. 이는 수많은 질문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했고, 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 ‘내 찌찌는 성스럽다’라는 답을 가진 사람들의 잔치였다. 내 몸을 긍정하는 새롭고 낯선 장일 뿐이었다.

찌찌순례는, 준비하는 과정도 행사 당일도 큰 즐거움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빨강 물감으로 맨 몸에 페인팅을 하고 음량이 빵빵한 외장스피커를 챙겼다. 무지개 깃발을 높이 세우고, 시원한 비를 맞으며 천왕문으로 갔다. 저 멀리서 이미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끈 나시, 원피스, 짧은 바지, 노브라, 상탈 등, 내 눈엔 모두 성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스님이 허락한 페미니즘’, ‘내 찌찌는 실상이다’, ‘자꾸 보아야 사랑스럽다’, ‘가슴해방’ 등 여러 문구를 적은 피켓들을 나누어 가졌다. 함께 마을을 행진하며 찌찌송도 목청 높여 불렀다. 각자 사랑스럽게 개사를 하거나 만들어 온 노래들이었다. 작은학교 학생분들의 노래가 자꾸 맴돌았다. 찌찌는 지지가 아니야. 찌찌는 우리의 일부야. 우리는 찌찌를 지지해.

행진을 마치고 카페에 모여 앉아 소감을 나누었다. 친구들이 웃통을 벗고 멀리서 걸어오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놀랐다는 소감이 많았다. 하기야 옷을 입고 태어나는 인간은 없지 않은가? 인간의 알몸은 무례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뚱뚱하다’, ‘다리가 짧다’, 등 몸의 정상성 속에서 자신의 몸을 혐오하던 사람들에게는, 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경험이 되었다고 했다. 젖꼭지가 있으나 없는 것처럼, 가슴골이 있으나 없는 것처럼 가려야 했던 여성들에게도 소중한 해방의 경험이었다. 찌찌 헌정시를 릴레이로 쓰자는 의견, 계곡에서 발가벗고 놀자는 의견 등 우리는 벌써 2회차 찌찌순례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었다.

그러나 2회차 찌찌순례 역시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불교 이천 년 역사를 존중해달라며 찌찌순례를 만류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게 변화한다는 사실 아니던가? 불교 이천 년 역사가 변하고 있는 것을,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듯 받아들이는 것은 어떠실는지.


- 산내소식지 고사리 7월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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