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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May 24. 2023

펜팔 5월 모꼬지

펜팔 방구일기칩코편


몇 시간 후면 이 테이블이 가득 찰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 테이블의 한 가운데 놓을 탐스러운 모란을 두 송이 꺾으며 생각했다. 누굴 사랑하려고 작정한 적이 있던가. 그들 중 한 명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해주시나 싶어요.” 그 말에 나 역시 ‘당신이 뭐’인지 반추해야 했는데, 기막히게도 그들은 내가 사랑하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지난 겨울 펜팔을 시작했다. 나는 응당 겨울이 돌아오면 조금은 가라앉는데 지난 해엔 유독 어떤 응답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환경운동이 지치던 차였다. 생명을 돌보려고 하는 일인데 왜 그 과정은 돌봄과 거리가 멀까, 라는 질문이 시작이었다. 친구들과 반쯤은 즉흥적으로 펜팔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먼 도시의 환경운동가들을 익명으로 모집했다. 열 개의 절기 동안 우리랑 편지를 주고받자고 했다. 누군지 서로 몰라도, 하루가 어땠는지 조곤조곤 떠들고 온기가 담긴 돌봄을 나누자고 했다.


방랑단 네 명과 서울의 환경운동가 네 명이 각자 짝을 지었다. 신청란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고려해서 서로 잘 맞을 법한 사람끼리 짝을 지었다. 내 짝꿍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시간 속에서 굳건히 경이로운 우리를 돌보고 싶다’고 써냈다. 나는 낭만적인 말은 별로 따지지도 않고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라 덥석 짝꿍이 되기로 했다.


낱말만 들어도 설레던 펜팔편지는, 결코 녹록치만은 않았다. 펜팔프로젝트의 가장 어려웠던 점은 황당하게도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이야말로 편지의 진짜 맛이 아닌가! 그러나 이건 그냥 펜팔이 아니고, 원고를 기다리는 잡지사와 그럴싸한 보고서를 기다리는 지원금 재단이 있는 펜팔’프로젝트’였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편지를 기다리는 먼 시골자락의 신비로운 펜팔짝꿍이었다가, 고뇌하는 작가를 달래고 재촉하는 잡지 편집장이 되었다가를 반복해야했다. 글을 쓰는 작업이란 본래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걸 간과한 대가였다.


이 감미롭지 않은 현실은 기획자로서의 숙명이었나 싶다. 기약없이 편지를 보내지 않는 펜팔 짝꿍들을 보채는 연락을 할 때마다, 어쩐지 내 생일파티에 와달라고 조르는 구차한 기분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받을 편지를 어떤 당위로 포장해서 빨리 내놓으라고 하는 꼴이지 않나. 왜 이딴 기획을 했는지 스스로 원망스럽기도 하고, 나를 이런 기분으로 내몬 펜팔짝꿍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전의 다른 기획이라면, 어떤 사람들이든 좋았다. 행사 규모에 맞는 인원이 대략 모이면, 한 두명쯤 지각하는 건 상관도 없었다. 그런데 이 펜팔은 도무지 그 짝꿍이 아니면 안되는 거다. 무려 열 개의 절기를 지나는 동안 지독하게 얽혀서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도서관에서 고양이서적을 뒤적거리는 집사처럼, 그들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그들의 앞선 편지들이었다.


왜 답신이 늦었는지 구구절절 미안함으로 흠뻑 젖은 문장이나, 근래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는 안쓰러운 근황이나, 언제나 자주 늦고마는 사람이라는 솔직한 고백이나, 다신 늦지 않겠다는 사랑스러운 결심을. 그리고 이어지는 생명을 향한 고민, 일상의 유쾌함, 어느날 친구와 나눈 대화, 읽은 책의 구절, 남다른 취향, 애정 어린 위로… 한 개인들의 잊을 수 없는 문체와 말습관. 무엇보다, 편지를 나누기로 한 연약한 약속을 지키려는 단단한 마음을.


나는 ‘이게 내가 생각하던 과정까지도 돌봄인 프로젝트인가’하고 자책했었지만, 일순 그야말로 이건 과정까지도 돌봄임을 깨달았다. 돌봄은 원래 그런 거였다. 대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거였다. 그 존재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지극하게 지킬 수 밖에 없는 것. 나는 어떤 문장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들의 편지를 기다렸고,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감동시키는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돌보고 사랑하기로 한 사람들이었다.


편지로만 알아가던 절기들을 지나고, 모란이 피는 오월에 그들을 만났다. 편지가 저당 잡힌 것도, 무슨 계약서를 쓰거나 원고료가 있던 것도 아닌데,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뭐라고 단념하지 않고 지리산까지 와주었을까. 그리곤 ‘내가 뭐라고 이렇게 해주시느냐’고 도리어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우리가 찬찬한 기다림의 날들을 지나는 동안, 지리산에서 두개의 낮과 하나의 밤을 웃음으로 채우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뭐가 된 걸까.


숲과 강변을 걷고, 편지구절을 나누어 읽고, 함께 요리하고, 별과 어둠을 보고, 이른 아침의 명상을 했다. 함께 했던 인디언 108배 구절에서는 ‘어제 때문에 오늘을 다 보내지 말라’라고 했는데, 그들이 돌아간 다음날을 온통 그들의 여운으로 보냈다. 여행자들의 시선은 천진한 아이처럼 날 놀래곤 했다. 나는 늘 지나치던 산책길의 들꽃을 그들은 사진첩에 담을 때마다, 오래된 거리처럼 익숙해진 내 집의 물건들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그랬다. 잔잔한 호수같던 내 일상에 물을 마시러 온 노루를 보는 듯했다.


이제 약속했던 돌봄의 시간이 지났다. 한동안 한가로울 메일함을 볼 적이면 그들이 떠오를 게 분명했다. 한시도 쉬지않고 발랄하게 일렁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눈빛이 반짝 뜨거워지는 촛불 같던 ‘돌’. 계곡의 심연을 부는 바람 같다가도, 넓은 강의 저 편에서 밀려오는 살랑바람 같기도 하던 ‘가로’. 용감하고 솔직한 편지에 꾸밈없는 들뜸을 가득 담는, 벌들의 웅성거림 같던 ‘갈토’.


그리고 맑은 날일수록 밝게 빛나고 흐린 날일수록 그리워지는 별 같던 ‘산달’! 정답고 애틋한 나의 펜팔짝꿍이었다. 편지만 나누다가 얼굴을 마주하는 건 기대보다 훨씬 더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어서, 나는 애먼 곳에서 불빛을 찾는 나방처럼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별이 뜨고서야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우리의 첫 이야기가 북두칠성이었나 보다. 그의 나긋하고 상냥한 음성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는데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의 편지 이야기들은 내내 여러번 돌려본 영화장면처럼 익숙했다.


그는 구례에 또 오고 싶다고 했다. 나 역시 원고를 기다리는 잡지사와 그럴싸한 보고서를 기다리는 재단 말고, 이제는 그만이 기다리는 편지를 띄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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