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발자다. 대학생 때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비록 학점은 3점대 초중반에 걸쳐있지만, 나는 내 전공 공부에 나름의 열정을 가졌었다. 커리큘럼을 따라가느라 바쁜 와중에 내가 취했던 망중한은 아마도 여러 가지 잡념이었던 것 같다. 전공과목에서 배운 알고리즘이나 기타 정보 처리 기법들은 프로그래밍 이외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곤 했다. 그렇게 즐기던 잡념들은 비록 서로 간에 유기적으로 매끄러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조리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일견 엉성해 보이는 상념의 편린들이 쓸모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례로, 사회에 진출하고서 나름 내게 희미하게 세상을 해석하거나 개념적으로 정리하는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이 객체지향적 프로그래밍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프레임워크는 컴퓨터에서 저장하고 처리해야 할 추상적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속성들의 집합을, 그러한 속성 값들에 대해서만 조작할 수 있도록 원칙적으로 제한된 채로 외부에 노출 가능한 창구들과 함께 하나의 단위 개념으로 묶을 수 있도록 마련되어있는 장치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을 하나의 객체로서 추상적으로 묘사하고 싶다고 하자. 그 텔레비전이라는 추상적 객체에는 텔레비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다음에도 활용하기 쉬울 것이므로, 그렇게 붙이겠다. 이 텔레비전이라는 객체는 용도에 따라서 필요한 속성을 맥락에 따라 다르게 골라서 사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텔레비전 객체를 상품으로 취급해야 한다면, 해당 텔레비전의 가격, 성능(물리적 크기, 해상도, 지원하는 편의 기능), 입/출력 포트의 종류와 개수 등이 그 객체를 묘사할 속성으로 선택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텔레비전 객체를 공학적인 이유로 추상화시켜야 한다면 조금 다른 조합의 속성들이 채택될 것이다. 이런 때에는 필요한 입/출력 포트의 종류와 개수와 같은 기술적 요소들은 여전히 포함될 지라도, 텔레비전 내부를 구성하는 전자부품의 종류와 조합들이 주된 속성으로 선택될 것이다. 이러한 객체는 상속이라는 프로그래밍 방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원래 객체화하고자 하는 실체적 개념이 '포유류 동물'이라고 한다면, 그 객체를 상속받은 자손의 객체의 이름은 사람, 개, 코끼리 등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위에서 예를 든 '포유류 동물'은, "해당 생물의 종이 명시되어야 그 구체성이 인정된다"라는 전제조건이 붙게 된다면, '객체'라는 개념의 예시로써 적절한 항목이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포유류 동물에 해당하는 생물 종은 단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복잡하고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소스코드를 줄이기 위해 비록 구체성이 없어도 여러 구체화 가능한 개념들이 공통적으로 피상속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개념의 도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위의 예에서 사람, 개, 코끼리들을 아울러서 가리키기 위해 '포유류 동물'이라는 명칭의 개념이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표유류 동물'에 대응하는 프로그래밍 개념이 인터페이스다. 널리 사용되는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사람, 개, 코끼리들도 각각의 개별적 개체를 객체라고 정의하고 그러한 개체들이 가지는 공통점인 '종'을 '클래스'라는 추상화 단위로 명명하지만, 여기에서는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클래스 개념은 의도적으로 생략하겠다.
나 자신이나, 옆집의 강아지, 텔레비전의 동물의 세계 속에 피사체로 등장한, 이름 모를 어느 코끼리를 귀납적으로 포유류 동물이라는 군집에 소속된 객체들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마음속에서 그리고 있는 동물을 포유류 동물이라는 인터페이스로 표현해 놓고, 자신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물의 종을 추론해내기를 요구받는다면, 그 객체를 알아맞히는 일은 스무고개 게임와 같은 프로세스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더라도 그 퀴즈를 낸 질문자의 신상에 대한 배경 정보를 단서로 이용하여 무작위 추첨(brute-force attack)보다는 정답일 확률이 높은 후보를 꼽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꼽아낸 후보라고 하더라도 그 스무고개 퀴즈를 낸 사람이 정답을 공개하지 않는 한에는 모든 것은 추측일 뿐, 정확한 정답이 될 수 없다.
예술의 영역에서 작가의 의도 및 목적과 감상자의 해석 및 효용이 상이하더라도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연역적인 해석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리한 연역적 사고 과정을 통하여 도출된 결론을 진리로 단정한다면 그것은 학문적 가치를 형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은 온통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선현들이 남긴 이야기들 중에서도 클래스 또는 객체보다는 인터페이스로써 이용하는 방향으로 접근할 때 오히려 유용해 보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이 문단의 골자를 고려한다면 어떤 관점에서 재귀적인 표현이지만,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타당한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재귀적으로 노자의 '무위'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노자가 생각했던 '무위'의 정의를 직접 노자에게 이러한 이슈가 해당할 수 있는 상황인지 질문하고 답변을 얻어낼 수 없기에 내가 자의적으로 사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재귀적'이라고 보았다.
한편, 무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들도 종종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의미가 조금 다르게도 사용될 수 있는 듯하다. '위'를 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힘을 얻은 자가 하고자 하는 것은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불확실성과 세상에 대한 몽매함은 순수한 영혼의 인생행로에 수많은 독버섯들과 같은 유혹과 위험들에 노출시킨다. 이기심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면 힘을 얻었을 때 누구나 자신과 그 자손들의 삶에서 그러한 위험을 제거하고자 하는 본능적 동기와 의무심을 갖는다. 하지만 안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유한한 자원을 독점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경쟁이 필요하다. 경제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화수분을 확보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듯이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연에 무위를 행하는 것은 때로는 자신이나 자손에게 자연 본연의 불확실성과 위험으로 몰아넣는 짓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가 보편화되기 전의 과거에서는 정치적 입지의 상속을 통해 후손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주고자 했고, 그러한 길이 헌정과 정치적 민주화에 의해 봉쇄된 이후에는 유일하게 허용된 경제적 입지의 상속을 통해 그러한 본능을 충족시킨다. 힘이 없는 자는 움직여도 위력이 작용하기 어려우나, 힘이 강한 자는 그 움직임이 정치적 위력을 가진다. 자연이 가지는 내재적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해 소집단이 위력을 행사하여 왜곡하기 시작하면 자연적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발생하는 소요로 이어진다는 직관적 통찰이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바일 수 있지 않았는지, 아마도 정답의 메아리를 들을 수 없을 스무고개에 던지는 하나의 추측으로 기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