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함수(hash function)와 추상적 속성 표현

자연어의 추상적 표현들과 해시함수 사이의 유사점에 대하여

by 정도령

"굳세어라, 금순아!"

"멘탈을 단련해야 해"

"좀 더 유연하게 행동해"


위와 같은 명령형 표현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기존에 굳세지 않다면, 지금보다 굳세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거야?"

"내가 기존에 유리멘탈이었다면, 멘탈을 단련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기존에 경직되어있었다면, 유연한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만약에


"그래, 나는 굳세지기 위해 굳세지는 내 마음을 상상할 거야."

"그래, 나는 강철멘탈이 되기 위해서 외부의 자극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질 거야"

"그래, 나는 유연한 태도가 되기 위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거야"


라고 결심했다고 하자. 이런 식으로 '결심'을 하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에 근접하는데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


- 굳세지는 내 마음을 상상해도, 그것은 구체적으로 실전의 상황에 부딪혔을 때 굳세게 헤쳐나가는 전략을 머릿속에 심어주는데 효과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 강철멘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상황을 상상하더라도, 그러한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전개가 아닌 실제 상황에 처해졌을 때, 나는 그러한 강철멘탈들이 보였을 법한 반응대로 행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 내가 마음이 열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 두개골에 창문이 열린 이미지를 상상하며 종달새가 날아들고 여명의 햇살이 비치는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평소와는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보기 위해 억지로 애를 써도 하루아침에 나의 관점이 전환되기는 어렵다.


왜 그럴까? 나의 잠재력이 비범한 사람들과 달리, 어떠한 영감을 주는 한 마디를 보고서 벼락을 맞는 듯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탓일까? 난 그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싶다. 나는 나 자신 외의 삶을 살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나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내 능력을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나는 인간의 정신적 특성을 관측하고 느낀 감상을 표현한 내용들 (예: '굳세다', '강한 멘탈', '유연한 사고', '열린 태도')은 대체적으로 물질들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이 많다. 이것은 그런 인상을 주는 사람의 정신적 기제와 그 기제로부터 우러나온 행위의 집합들로부터 관찰자가 얻은 감상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상적 표현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러한 평가를 받은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작용을 타인의 내면에서 동일하게 재현할 단서는 희박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나, 윌리엄 제임스의 "악의적 추상화(vicious abstractionism)"가 지적하는 성격의 발화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추상적 비유들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그 표현들을 곱씹으며 사색하면 마치 그것이 가리키는 본질적 성격을 내면에 구현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보통 전산의 세계에서 데이터 압축이나, 데이터 지문, 암호화 등에 사용되는, 해시 함수의 결과물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시함수를 통과한 결과물은 그것을 단서로, 해당 해시 함수의 역함수를 만들거나 하는 방식으로 그 입력값을 재현해낼 수가 없다. 해싱 과정에서 입력물을 형성하는 주요한 정보들이 소실되기 때문이다. 해시 함수 역시 그 자체가 역함수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듯이,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낳은,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의 표현물에 대한 관찰과 감상 과정 역시도 그것의 역함수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어 처리 등과 같은 인공지능을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자연어의 이러한 특성은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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