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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Dec 15. 2021

만추, 가벼움이 주는 무거움

더 깊은 위로와 공감을 주고받았던 짧은 만남, 그 영원함

영화 만추에 대해 이동진은 ‘사랑은 곧 시간을 선물하는 일’인데 이것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72시간이라는 자유시간이 주어진 죄수 애나 그리고 사랑이 쉬운 남자 훈. 이 두 조합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만들어질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짧게 보낸 그들이 함께한 시간으로 애나와 훈은 몇 년을 따뜻한 마음으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김태용 감독은 ‘진심’이라는 무거운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왕징과 훈의 대비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왕징은 훈에게 그녀에게 게임을 하지 말라 경고하는데 훈은 ‘게임이 뭐가 나쁘냐, 그녀를 웃게 해준건 나다’라고 대답한다. 생각해보면 애나와의 미래를 그리며 사랑했던 왕징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버렸고 그녀와 상관없이 아이를 낳고 현재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와의 미래를 그릴 수 없는 훈은 오히려 이 순간 가장 애나에게 충실하며 그녀의 슬픔, 귀에 생긴 알레르기 조차도 가볍게 넘기지 않고 위로해주려 한다. 처음 만난 훈이 역설적이지만 애나에게 가장 큰 호의와 관심, 배려를 베푸는 것이다. ‘가벼움’이라 치부한 것이 오히려 애나를 웃게 만들었다. 미래라는 무거움의 장벽이 얼마나 많은 진심을 막고, 사랑을 막고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가.


애나가 포크에 빗대어 왕징에게 처음으로 속마음을 토해내는 장면도 포크라는 ‘가벼운’ 매개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자신이 가진 원망, 슬픔을 말하기 힘들었던 애나이지만 포크를 통해 용감해지고 무너져내리기까지 한다. 깊은 진심을 끌어올리는 건 가벼운 매개체들이다. 이 매개체를 통해 비로소 심연에 있던 진심들이 상층부로 끌어 올라와지고 수면 위에서 폭발을 느낀다. 애나와 훈이 범퍼카 안에서 지나가는 연인들에 빗대어 역할극을 할 때에도 가벼운 매개체가 얼마나 깊은 심연을 가리키고 있는가 느낄 수 있다.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다. 특히 사용하는 모국어 자체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은 연기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작용을 많이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대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진심, 태도, 기분, 분위기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연기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연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애나가 중국어로 말할 때 훈이 “하오”와 “화이”로 대답하는 장면에서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말하는 태도, 분위기, 정서 등을 살펴 화답해주는 훈의 모습은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탕웨이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사가 별로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정서가 그대로 느껴진다. 항상 중국 배우들의 눈빛이 인상적이라고 느꼈는데 탕웨이의 눈빛에서도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쓸쓸함, 애잔함이 있고 그게 영화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연기를 통해서 애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용을 예측할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결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나는 탕웨이의 연기를 보고 훈이 카페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오랜만에 조우하였는데도 그녀의 눈빛의 그의 걸음에 맞춰 따라가지 않으며 그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기 힘든 반응들이 연속된다. 실제로는 아무도 없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느낌이 강했다.


현빈의 연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현빈의 연기가 어색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번에 봤을 땐 생각이 좀 달라졌다. 특히 탕웨이와 비교하면 둘이 지향하고 있는 연기의 방향이 매우 다르고 이 대비가 둘 사이의 케미를 떨어뜨린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터프한 표현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탕웨이는 영화 연기를 하고 있고 현빈은 드라마 연기를 하고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현빈은 자꾸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점에선 오글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연기가 드라마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확실히 드라마가 추구하는 연기, 영화가 추구하는 연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보면 볼수록 할 이야기가 많아지는 영화다. 스토리, 연출, 연기 모든 지점에서 그렇다. 김태용 감독이 얼마나 섬세한 감독인지 새삼 느껴본다. 많은 이야기를 생산하고 재해석을 양산할 수 있어야 좋은 영화라고 하는데 만추는 꼭 그런 영화인 것 같다.


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귀를 긁지 말라고 말해주는 장면이 이상하지만 계속 생각난다. 어쩌면 애나가 처음으로 그에게 마음을 열었던 순간이 아닐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사랑이라 정의한 사이보다 더 깊었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의 이야기 ‘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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