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체크인 서류에 사인을 하다 말고 움찔 고개를 들었다. 호텔 리셉션이 하는 말치곤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열쇠는 평범한 데다 한 뼘 길이 나무 막대를 달아 일부러 잃어버리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뒷목이 서늘했다.복도 끝 그늘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 싶어 신경이 순간 곤두섰다.
리셉션의 노르웨이 사내는 내가 떨떠름해하는 걸 눈치챈 듯했다. 가슴에 Cnut라는 이름표를 달았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별 건 아니고요, Cnut가 마시멜로를 권하며대답했다. 그가 설명하길 정기적으로 분실된 열쇠를 새로 만드는데 201호를 제일 많이 주문한다고 했다. 심지어 열쇠 제작하는 사람도 "비밀이 뭘까?"하고 궁금해한다고. 뭐 그 정도쯤이야. 나는 '심지어'라는 말이 걸렸지만 어물쩍 웃어넘겼다.
흙더미와 풀로 덮은 집은 바이킹 시대부터 존재했다. 이런 모습의 별장을 히테(hytte)라 부르며, 이곳에 머무는 히테투르(hyttetur)를 좋아한다
201호란 2동의 1층을 가리켰다. 2동은 리셉션에서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만큼떨어진, 4인 가족용 스위트룸 두 개가 위아래로 붙은 목조 건물이었다. 산장답게 취사도구가 야무지게 갖춰져 있고, 가문비나무를 깐 거실 바닥은 소파 주변 굵은 러그와 잘 어울렸다. 거실 벽에 붙은 계단을 오르면 복층 공간에 침대가 두 개, 아래층 욕실 옆으로 작은 침실이 하나 더 있었다. 무엇보다 긴장을 풀어주는 건 거실과 연결된 테라스였다.
테라스에 앉으니 200m 떨어진 뢰르달 호수와 그 너머 뢰르달 산의 흰 이마가 손에 잡힐 듯했다. 눈이 녹아 수량이 불은폭포 줄기는막 잠 깬사내아이의 오줌발마냥 포물선을 그었다. 산꼭대기가 내쉬는 콧바람은 바위틈에서 겨울을 견딘 이끼 포낭이나 햇볕에미지근해진 길섶 흙냄새를 묻혀왔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럴 때 '코슬리(koselig) 하다' 고 말하는데 그게 무슨 느낌인지 저절로 짐작되었다. 나는 기분이 조곤조곤해졌다. 아내는 빈 냉장고를 살피고, 아들은 TV 리모컨을 든 채 소파에 눌러붙어 '액괴'놀이에 빠졌다. 열쇠 이야기는 금방 잊어버렸다.
노르웨이는 5월이 되면 슬슬 길이 뚫린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 폭포 수량이 많아져 풍광이 상쾌해진다. 부지런한 하이커들이 트레일에 나서지만 아직 위험이 숨어있다.
뢸달스테라센(Røldalsterrassen)은 여느 호텔과는 달랐다. 인적이 드문 산등성이에 로지(lodge) 여섯 채가 단출했다. 우리로 치면 대관령 허리쯤에 붙은 산장이라 할까. 지금은 6월 말, 여름 시즌이라 하기엔 아직 일러서 투숙객이 드물었다. 우리뿐일지도 몰랐다. 그게 맘에 걸렸지만 그래도 진입로 입구 모던한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고, 아침 식사가 훌륭하다는 리뷰가 달려 안심이 되긴 했다. 겨울 스키어와 여름 하이커를 상대로 두어 달 바짝 영업한다고 했다. 요즘 투숙객은 왕복 8시간 걸리는 트롤퉁가를 다녀오는 사람들이 오다(Odda) 시내에 숙소가 차서 여기까지 떠밀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나처럼 프레이케스톨렌을 등반했거나.
오늘 나는 프레이케스톨렌(Priekestolen)을 올랐다. 프레이케스톨렌은 트롤퉁가보다 길이 쉬운데도 왕복 다섯 시간이 꼬박 걸렸다. 바위틈 산딸기와 블루베리를 따느라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북유럽에는 '알레만스레텐'(allemansratten)이라는 근사한 권리가 있다. 보호종만 아니면 누구나 야생 식물을 채집해도 되고, 가옥과 일정 거리만 두면 사유지에서조차 야영이 가능하다. 우리말로 '자연에의 접근권리'(freedom to roam) 쯤 된다.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느라느지막해서야 산아래로 내려왔다. 거기서 베르겐까지는 250km, 차로 네 시간 거리였다. 나는 등반하느라 지친 몸으로 어두워지는 산길을 운전하는 게 부담스러워 이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러니까 큰 기대 없이 하룻밤 쉬고 가면 되는 일정이었다. 오랜만의 산행에 혼곤해진 나는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다. 문제는 다음 날 불거졌다.
프레이케스톨렌은 제단바위(Pulpit Rock)라 부르기도 한다. 뤼세피요르드(Lysefjorde)를 배경으로 해발 604m의 가파른 절벽이다. 오른쪽은 라테포센 폭포.
아침을 먹으러 간 뢰르달 레스토랑에서 신용카드를 거부당했다. 카드를 안 받는 게 아니라 승인이 떨어지질 않았다. 산속이라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았는데 그거 때문이라면 내가 통신 장애를 해결할 순 없었다. 다른 카드를 줘보랬지만 공교롭게도 지닌 건 한 장뿐이었다. 요즘이야 신용카드를 여벌로 챙겨 다니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 노르웨이는 현금을 거의 쓰지 않는 '캐시리스' 사회라 유로나크로나를 따로 갖고 있지도 않았다. 난감했다.
툴툴대는 아내와 아들 녀석을 달래 산장을 일단 떠나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슈퍼, 쿱(Coop)은 10km나 내려가야 했다. 오다 시내까지는 38km나 되었다. 서울은 토요일 새벽이라 은행에 전활 해서 뭐가 잘못됐는지 물어보기도 마땅찮았다. 끼니에 예민해지는 가족들 심기를 달래려면 아침 먹을 데를 얼른 찾는 게 급선무였다. 마침 체크 아웃은 몸만 떠나면 되는 'Leave Everything Behind' 방식이라 시간 걸릴 것도 없었다. 나는 황망히 출발 시동을 걸었다.
노르웨이에는 COOP, KIWI, REMA1000, ICA 따위의 슈퍼마켓이 있는데 작은 동네에 있는 슈퍼는 규모가 작다.
다행히 쿱은 금방 찾았다. 산 아래 제일 번화가에 있었다. 그래 봤자 신호등 하나에 슈퍼가 전부였지만. 마켓 한쪽 코너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팔았다. 딱딱한 빵에 연어와 샐러드, 토마토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 이름이 그라브락스 스메뢰브레(Gravlax Smørbrød)라 했다. 가게 앞 테이블에서 푸글렌(Fuglen)을 곁들여 그럴듯한 아침 식사를 했다. 푸글렌 커피는 산미가 풍성했다. 노부부가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슈퍼가 우체국을 겸하는지 우편배달차도 들어왔다 나갔다. 팔등이 따뜻했다. 햇볕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나는 운전하며 마실 요량으로 1.5 리터짜리 생수 이즈브레(Isbre)를 네 개들이 묶음으로 하나 샀다. 신용카드는 잘만 들었다. 역시 아까는 통신이 말썽 부린 모양이었다. 차를 출발시켰다. 아내와 아들은 까무룩 잠에 떨어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베르겐에 거의 다 왔는데 "부르륵"하고 휴대폰이 흔들렸다. 휴대폰 화면 상단에 한 줄 문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렀다. 휴대폰을 구글 네비로 쓰느라 운전석 앞 유리에 거치대를 붙이고 올려놔서 문자가 들어와 '북북' 대면 신경이 쓰였다. 대리운전이나 바다 이야기 스팸은 아니었다. 마침 연료 게이지도 바닥에 가까워 눈에 보이는 에쏘(ESSO) 주유소에 차를 댔다. 문자는 뢸달스테라센에서 보낸 거였다.
노르웨이 렌터카 여행은 풍경 때문에 질리거나 혹은 경의롭거나 하다. 오른쪽은 노르웨이의 희한한 과속표지판. 도로변 저 여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면 당신은 과속 중이다.
내용은 이랬다.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201호 열쇠가 안 보여. 혹시 어디 놓아두었는지 기억해봐 줄래?" 체크 인 할 때 받은 인보이스를 꺼내보니 만약 열쇠를 제대로 반납하지 않으면 제작 비용을 부과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연료통을 채우는 동안 화장실에 다녀온 아내에게 혹시나 해서 열쇠 행방을 아는지 물었다. 아내는 "어머!" 하고 비명을 지르며 뒷좌석에 던져놓은 카디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201호 열쇠가 분명했다. 아침 먹으러 갈 때 들고 나왔다가 신용카드가 안돼 부랴부랴 출발하는 바람에 그냥 주머니에 넣고 온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몸서리를 쳤다. 되돌아가긴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습게 생각했던 리셉션 Cnut의 예언이 이렇게 들어맞는구나 싶었다. 뭐 그래도 큰 일이랄 것까진 아니었다. 베르겐에 도착하는 대로 우편으로 보내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 사이 열쇠 값을 청구할까 봐 얼른 답 문자를 넣었다. "201호 열쇠가 우편으로 네게 곧 도착할 거야. 번거롭게 해서 미안" 이라고.
눈이 녹으면 산등성이에 숨었던 폭포들이 나타난다. 노르웨이 산에 숨어 사는 요정, 트롤(Troll)이 이런 곳에서 출몰하곤 한다.
하지만 베르겐에서 나는 열쇠를 붙이지 못했다. 우체국을 찾는 것도 일이거니와 짬이 나질 않았다. 플뢰엔 전망대를 내려오다 '포스트콘토'(Postkontor)라고 쓴 우체국 간판을 발견했는데 그땐 호텔 주소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한번 기회를 놓치자 다시 발걸음 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재촉 문자가 다시 오질 않아 빨리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무뎌 저 버렸다. 마침내 나는 '괜찮아 서울가서 보내주면 되지.' 하는 체념 반 안도 반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나는, 도대체 어떤 법칙이 201이란 숫자에 작용하는 걸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건그저 우연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투숙객이 Cnut의 말을 너무 의식하는 바람에 도리어 그렇게 되어버렸을 수도. 심리학자가 얘기하는 '피그말리온'이니 '데자뷔'같은 말도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들었다. 귓전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듯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그러니까 주머니에 열쇠를 넣은 채 뢸달스테라센을 떠난 이들이제법되니까너무자책하지 말라는. 그러자 허공 속에서 머뭇거리며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앞장선 사람이 내미는 무의식의 손을 잡았다.어쩌면 우리는 존재 이유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비밀스러운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세상 곳곳에 방랑형 점조직처럼 흩어져 살지만, 보름달이 뜨면 땅끝 같은 곳에 모여 '압생트'를 마셔도 좋겠다 싶었다.그러면리셉션 사내가 꼬챙이에 끼워 굽던 마시멜로를 권하며 비밀의 실체를 말해줄것 같았다. 신용카드 거절은 미안했다고 덧붙이면서.
왼쪽은 접근하기 쉬워 사람들이 많이 찾는 브릭스달(Briksdal) 빙하. 오른쪽은 가장 보존이 잘된 보르군드 목조교회(Borgund Stave Church).
보름이 지나서야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출근하던 날 바로 회사 근처 우편취급국을 찾았다. 뢸달스테라센에 열쇠를 부쳐주기 위해서였다. 여태 아무런 비용도 청구되지 않았다. 그게 다행인데 불편했다. 열쇠를 종이 박스에 담고, 늦어서 미안하다는 메모와 함께 뢸달스테라센으로 보냈다. 열쇠만 달랑 넣기엔 미안해서 작은 선물도 같이 넣었다. 선물은 201호 열쇠를 하나 더 복사한 것이었다. 을지로 지하도 열쇠 가게에서 8천 원에똑같은 걸 만들어 두 개를 나란히 포장했다. 자주 없어지는 201호 열쇠에 마음 쓰는 호텔리셉션의 시름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의 이름은 '크누트'라고 읽었다.
우체국을 나섰다.찜찜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길 건너 영락교회 골목에걸린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가로 현수막에는 검은 고딕체 글씨로'Jesus loves even You'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even'이란 단어에덜컥마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