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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n 30. 2020

404 Not Found

보스니아



"신의 존재를 느껴본 적 있어요?"

그가 물었다. 나는,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오뚝한 콧날과 살짝 찌푸린 미간, 가지런한 치열이 '킴블리 클라크'의 중역이라는 본인 소개와 잘 어울렸다. 줄무늬 린넨 셔츠도 근사했다. 나는, 왜 그러는데요, 하고 되물었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나만 성당을 다니지 않았다. 그는 아까 자신을 '라파엘', 전화받으러 나간 아내를 '스텔라'라고 소개했다. 나는, 서해입니다, 라고 맨 이름을 댔다. 통성명을 하는데 벌써 소원해지다니. 성당 나오라는 말부터 할 건가라는 방어기제가 내 어깨를 목도리도마뱀처럼 세웠다. "딱히 의미는 없습니다." 그가 검지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까딱거리는 손가락 뒤로, 창밖 먼바다에 화물선이 떠 있었다. 지난봄 발칸반도 스르지산에서 보았던 아드리아해 풍경과 비슷했다. 그가 무언가 다음말을 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어지러운 햇살 속으로 그때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아아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네요, 하고 크로아티아에서 겪은 일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니엡. 유 고우 백!"

산 꼭대기 초소에서 키 큰 크로아티아 병사가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가슴 주머니에 붙은 꺾쇠 계급장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바람에 측백나무 이파리들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가 돌아누웠다 난리를 쳤다. 여기만 건너면 보스니아다. 그런데 굵은 통나무 차단기와 사나운 국경 수비대가 길을 막아선 것이다. 국경 세관이 아니고 군 초소인 게 이상했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건 더 심상찮았다. 산길은 좁고 차는 우리뿐이었다. 나는 옆창을 살짝 내린 후 "메주고리예 처치"라고 최대한 짧고 공손하게 행선지를 말했다. 베레모를 어깨에 말아 넣은 군인은 키릴 문자로 쓴 영문모를 표지판을 가리키며 고개를 완강하게 가로저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 원트 프로블로메?"라는 말이 거칠 돌아왔다. 그때 대시보드에 올려놓은 휴대전화에서 '딩딩' 하며 문자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국경 가까이 접근하면 통신사에서 보내주는 우리나라 외교부의 <여행주의> 알람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바깥 군인에게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덕이고는 천천히 차를 돌렸다.



지금부터 2km는 멧돼지가 출현하니 조심하라는 표지판이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로 넘어가는 산길은 인적이 드물고 야생동물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아침부터 일이 꼬이긴 했다. 갑자기 내비가 말을 안 들을 줄이야. 메주고리예는 가톨릭 신도 사이엔 꽤 소문이 난 성모 발현지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130km, 차로 시간 남짓. 거리로 치면 어려운 걸음은 아니다. 보스니아 땅이란 점제외하면. 1991년 유고 연방이 해체되자 보스니아계 무슬림, 세르비아계 정교도, 크로아티아계 가톨릭 신도들 간에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이 시작됐다. 보스니아는 80%가 이슬람교와 세르비아 정교를 믿는다. 몇 년 사이 10만 명이 죽고, 230만 명이 길바닥에 나앉았다. 마을 외곽 공동묘지 비석의 사망연도가 모조리 1993년으로 적혀있을 정도였다. 미국의 개입으로 1995년 총소리는 멎었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했다. 성모는 하필 이런 위험한 곳에 나타나셨고, 호기심 많은 나는 그 배경이 궁금했다.


더 큰 이유는 아내 때문이었다. 날벼락같던 선고와 수술을 받고 성당을 다시 찾는 아내. 캔서(cancer)란 말의 라틴어 어원이 게(crab)이다.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옆으로 잘 옮겨가는 암의 못된 성질을 게 걸음에 빗대 이렇게 이름 지었다. 잠깐 사이 개펄을 후루룩 걸어 오는 바다게처럼 병마식간에 내의 육체를 점령했. 집안 곳곳에 썰물에 드러난 개펄 마냥 숭숭 구멍이 생겼다. 어두워지면 불안해하며 묵주를 놓지 못하는 아내. 나는 잠들지 못하는 아내의 에 메주고리예의 성모가 가져왔다는 평안을 쥐여주고 싶었다.    


열흘 전 자그레브에서 빌린 차는 폭스바겐이었다. 폭스바겐 파사트는 꽤 좋은 내비를 탑재하고 있었다. 오디오 시스템도 훌륭해서 차로 움직이는 동안 아내는 tvN《나의 아저씨》 OST를 무한 반복으로 들었다. 드라마를 초반 몇 회 보다 온 아내는 매일 밤 다음 회를 찾느라 로밍 데이터를 축냈다. 오늘도 차에 타자마자 노랠 들으려고 블루투스를 만졌는데 뭘 잘못 건드렸는지 오디오 시스템 전체가 묶여 버렸다. 화면에 "404 Not Found" 라는 메시지만 뜰뿐 차량 내비까지 한꺼번에 죽어버렸다. '껐다 켜기'도 소용없었다. 뭐 그렇다고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대신에 챙겨온 크래들을 조수석 서랍에서 꺼내 운전석 창에 붙이고 휴대전화 구글 맵을 켰다. 그런데 구글 맵이 그만 우릴 엉뚱한 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표지판이 있으면 아무리 산길이라도 마음이 놓인다. 간판이 녹슬거나 훼손되지 않았으니 왕래가 있다는 의미로 짐작하였다.


구글 내비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차량 내비는 운전자가 루트 옵션을 눌러 'Fastest'와 'Shortest'를 결정할 수 있다. Fastest는 시간이 제일 덜 걸리는 '빠른 길'이고, Shortest는 거리가 가장 짧은 '최단 거리'다. 구글 내비는 이런 선택 기능이 아예 없다. 디폴트로 설정된 게 'Shortest' 값뿐이다. 이게 여행자를 골탕 먹인다. 목적지까지 직선거리만 짧으면 구글은 손수레나 가는 좁은 길이든 비포장 흙길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끌고 들어간다. 외딴 산길 수렁에 빠져 헛바퀴만 돌리거나 성난 현지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장터에 갇힌 차는 구글 내비의 '최단 거리'에 속은 경우다. 어찌어찌 빠져나온다 해도 시간은 한참 더 걸리고 만다. 식은땀은 덤이다. 자동차 여행자가 Sigic이나 Waze 같은 유료 앱을 많이 찾는 이유다. 구글 내비를 쓸 때는 대안 경로를 잘 살펴 조금 우회하더라도 차가 쌩쌩 다니는 'Fastest 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오늘 구글 내비의 심술당할 줄이야. 더구나 구글엔 이보다 더한 함정이 또 있었으니.


우리나라는 구글에게 '지도 반출'을 아직 허락해 주지 않다. 구글은 자기네가 소유한 전용 위성에서 받은 상세 지도를 쓰지 못하고 할 수없이 SKT로부터 허접한 T맵을 사서 그걸로 우리나라를 커버한다. 그 때문에 서울에선 아무도 구글 내비를 쓰지 않는다. Yelp, Foursquare 같은 구글과 연동되는 맛집 앱도 서울에선 무용지물이다. 오죽하면 테슬라는 자율주행차 서비스를 위해 우리나라만 Waze 맵을 사서 따로 깔았을까. 나중에 알았지만 보스니아도 그렇다. 구글이 지원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크로아티아 해안선을 따라 두브로브니크를 가려면 보스니아 땅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내륙 국가인 보스니아가 바다와 닿는 유일한 도시, '네움'(Neum)이라는 곳이다. 이곳이 가까워지면 구글이 끊어진다. 구글 내비를 켠 자동차는 산으로 올라가거나 위험천만한 해안 절벽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구글 오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내가 딱 그랬다.



메주고리예는 보스니아어로 '첩첩산중' 또는 '산과 산 사이'라는 뜻이다. 21km를 더 가면 메주고리예 성야곱 성당이 있다는 표지판이 어찌나 반갑던지.


산길을 내려왔다. 크게 봉변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국경 초소가 이리 험상궂을 줄이야. 이제 구글 내비를 믿을 수 없으니 운전은 눈짐작으로 해야 했다. 본능과 감각에 의존하는 수밖에. 큰길을 따라 네움을 지난 후 '사라예보'로 가는 길을 운 좋게 찾았다. 핸들을 꺾어 차를 올렸다. 다행히 톨게이트 모양을 한 국경이 곧 나타났다. 메주고리예 가는 길을 물어보고, 30km를 더 달려 램프를 빠져나왔다. 바로 마을 입구였다. 두브로브니크를 떠난 지 세 시간 만이었다.


본당 미사는 성찬식마저 끝나가고 있었다. 아내는 성수만 찍어 바르고 줄 끝에 따라붙어 거의 마지막으로 영성체를 모셨다. 신부와 작별한 아내는 두 손을 모은 채 퇴장하는 사람들을 거슬러 앞으로 전진하였다. 제대 앞까지 걸어간 아내는 바닥에 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 성당은 천천히 비어 가고,  공간 속으로 아내의 기도가 어올랐다. 나는 아내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콧등찡긋다.  나에게 어떤 생각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쩌면 신은 우리에게 온전히 '제힘'으로 오라고 내비를 멈춘 게 아닐까 하는. 목발을 던지고 마지막 계단을 무릎 만으로 기어오르는 불구의 순례자처럼 신은 우리에게 지도와 장비를 버리고 '맨눈'과 '맨손'으로 찾아오라 분부하신 것이라고. 마침내 당도한 아내에게 자가는  팔을 벌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주겠다귀를 기울이는  같았다. 아내가 몸을 일으켰다. 기도를 마친 모양이었다. 나는 늦게야 도착했지만 결코 늦지 않았다는 기분이 되었다.



로마교황청은 2019년 5월에야 메주고리예 순례를 허용했다. 성모발현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도움을 받은 신도가 많으므로 순례를 금지하지 않겠다는 정도이다


성당 복도는 25개나 되는 고해소로 꽉 차있었다. 우리는 참회의 밭을 걸어 청동 예수상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성경 속 마리아와 제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들어 내렸는데, 이곳 예수는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름도 '메주고리예의 일어서는 예수상'(Medugorje's Risen Christ Statue)이다. 몸을 세우는 예수의 오른쪽 무릎에서 신기하게도 물기가 흐른다. 이 물자국을 닦으려고 언제나 사람들이 긴 줄을 선다. 처음엔 예수의 상처를 낫게 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였다. 지금은 예수의 상처를 닦은 물기로 환자의 아픈 곳을 문지르면 병든 사람이 치유된다는 믿음이 더 커졌다. 이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소외된 사람, 뒤처진 사람, 아픈 사람들이다.


아내가 에 섰다. 예수상의 무릎은 손을 뻗어야 닿을 만큼 높았다. 아내는 뒤꿈치를 들고서야 가까스 물기를 훔쳤다. 간절한 까치발었다. 옷섶을 열고 아내는 손을 넣어 아픈 가슴을 닦았다. 수술한 부위다. 아내는 감정이 복받치는지 청동상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짧 긴 순간.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뒤에 선 할머니가 아내의 흔들리는 어깨를 쓰다듬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는 연거푸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붉어진 내 눈시울을 가릴 게 휴대전화 카메라밖에 없어서였다.



청동 예수상 옆에서 줄지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자기 차례가 되자 준비한 거즈로 예수상의 무릎에 흐르는 물기를 훔치고 있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그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나는 말을 중단했다. 혹시 내 목소리가 떨렸을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긴 싫은데. 다행히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나에겐 따르지 않았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그가 의자를 당겨 앉는 바람에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마침내 아내와 스텔라라고 했던 그의 부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 손을 든 건 여자들에게 '이쪽이야' 하표시였음을 알았다. 아내는 신도시의 작은 성당에서 몇 년째 레지오 활동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이들 부부를 만났다고 했다. 지난해 장인의 장례식에서 연도(憐悼)를 부르는 그의 부인을 본 적이 있다.


아내와 서로 동갑이라 했다. 멀쩡해 보이는 그의 부인도 수술 후유증으로 장애가 있다고 했다. 아픈 사람들끼리 신앙을 핑계 삼아 서로 배려하고 위로를 나누는 눈치다. 그는 부인을 따라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듯했다. 나이는 나보다 네다섯 살 위고, 회사 직급으론 훨씬 더 높다. 그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면 가끔 내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깨닫게 겠지"하고 믿는 듯했다. 여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남인도 첸나이에서 겪은 이야기를 꺼냈다. 킴벌리 아시아 본부에서 일할 때라며.  



메주고리예 성당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넘친다. 앞 좌석 등받이에 이마를 찧으며 기도하는 사내.


디왈리 축제를 구경하며 시내를 돌아다니다 그는 길을 잃었다. 지도를 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길가에 앉은 남루한 사두에게 도움을 얻기로 했다. 사두(sadhu)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을 다. 사두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너는 길을 잃었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신의 계획에 따라 어딘가로 가는 중이다. 길을 잃은 순간에도 너는 분명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인도의 수행자를 많이 봤던 그는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동전을 발밑에 떨구고 일어서는 사두 낡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덧붙였다. "신은 우리를 지름길로 가게 하려고 길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라고.


그가 찾던 는 바로 다음 골목에 있었다. 나중에 숙소 주인이 종이를 보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말이라며 이렇게 해석해 주었다. "많은 길을 돌아서 그대에게 갔지만 그것이 결국 그대에게 가는 직선거리였다"라고. 아뿔싸 하고 외칠 뻔했다. 누군가 보였다. 신의 존재를 느낀 적이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거북살스러워하던 내가 어느새 "다" 라면서 맞장구를 치모습이 거기 있다. 부흥회에 참석한 신도마냥. 무슨 간증이라도 하듯 갖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란 사람 말이다. 햇살이 어지러웠다. 그의 화술에 어떻게 넘어갔는지 헷갈렸지만 억울하거나 속은 기분이 들진 않았다. 이야기하는 동안 오히려 그가 임의로워졌다. 그의 세례명 라파엘이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는 대천사' 였다는 사실이 마침 떠올랐다.



1981년 6월 산중턱 여섯명의 아이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바위산으로 오르는 순례자들.


그날 두브로브니크로 돌아오는 길은 순조로웠다. 아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저녁이었다. 산모퉁이를 도는데 묶였던 폭스바겐 오디오에서 잡음처럼 지지직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였다. 몇 시간 동안 시동을 끈 채 차를 세워뒀던 게 저절로 시스템 오류를 바로잡은 듯했다. 아니면 시스템을 꺼버렸던 누군가가 다시 켰을지도. 볼륨을 조금 올렸다. 소리가 커졌다. 아내가 맞춰놓았던 《나의 아저씨》 OST였다. 성당을 막 떠나서 그런지 아저씨라는 의미를 가진 'Him'이란 단어가 찬송가를 가리키는 말 'Hymn'과 발음이 같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눈앞에  무언가가 떠올랐다가 수그러졌다. 렇다고 어떤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에이 무슨 말장난이야"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현실과 상상을 잘 구분하지 못하였다. 운전 중에는 더 그랬다.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엉뚱한 결론으로 치닫기도 했었다. 그 순간이었다. 자는 줄 알았던 아내가 가만히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아 노래는 또 뭐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이제 와 이켜 보면 정말 그때 아내가 노래를 따라 불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 않는다. 다만 노래의 첫 구절이 온통 머릿속을 장악했던 건 분명. 수녀와 복사(服事)가 부르는 그레고리안 의 어느 구절처럼.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늘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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