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를 결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오랜만에 아이와 그림놀이를 하려고 손바닥만한 스케치북을 챙겼다. 취미활동으로 그림을 그려야지 하면서 화구점에서 사두었던 두툼한 종이의 스케치북으로 겉표지는 검은색으로 단단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고 스프링이 아니라 떡제본으로 되어 손에 착 감기는 맛이 있다.
아이의 아기 때 모습이 그려진 페이지, 손글씨 연습하던 페이지, 슬 데 없는 낙서같은 습작을 한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예전 나의 짧은 미래 목표를 메모해둔 페이지를 발견했다.
장효진의 2020년 9월부터 2021년 12월까지의 목표를 적은 페이지였다.
그 당시 나는 40대에 접어들었고, 대학원 박사 프로포절에서 대차게 물먹은 후로 한동안 대학원이나 관심있던 연구에 의욕을 접고 회사생활 1년을 하고는 그래도 박사는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때였다. 나이 마흔이라는게 신기해서 대학교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십년 전이라니...하는 생각이 드는 대혼란의 시기다. 아이도 있고 당장 다달이 가계지출은 정해져 있어서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데 앞으로 또 살아가야 할 날은 살아온 날보다 많으니 당장의 나도 건사하면서 미래의 나도 챙겨야 하는 대환장의 시기가 아닌가. 그런 긴장감이 나를 무턱대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했나보다. 그러고는 앞으로 40년을 챙길 수 있게 찬찬히 내 몫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2022년 7월 초입에 들어서는 지금그 페이지를 읽다보니 다행인 것이 대부부은 다 조금 늦었을 지언정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1번 목표 박사학위
1) 2020.10월 프로포절, 아마 박사학위 프로포절 두번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이니 두번째도 겨우 겨우 넘어간 것이라 이 부분은 아직도 부끄럽다. 그래도 지나갔고 계획한 대로 마무리를 지었다.
2) 2021.3월 논문 완성, 이 때 한 대학에서 파트타임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소논문 쓰고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내 학위 논문에 집중할 수 없었다. 대신 논문 방향을 계속해서 시뮬레이션하면서 연관 프로젝트를 한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 박사 학위 논문은 2021년 12월 말에야 겨우 마무리 되었다.
3) 2021.5월 심사, 당연히 위에서 쓴 대로 2021년 하반기로 미뤄졌고 세차례의 살 떨리고 불면의 심사를 거쳤다.
관련 소논문은 프로젝트와 개인적으로 관심 주제로 틈나는대로 박사 관련 주제로만 6편 정도 작성한 것이 있어서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2번 목표 강사 혹은 연구원되기, 본격적인 커리어 준비
1) 2021년 1학기 강의 준비, 관련 주제 혹은 전공 주제의 강의를 대학 혹은 문화센터 등에서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었다. 코로나 시기여서 대부분의 오프라인 강의는 온라인으로 대체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어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프로젝트에 집중하면서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 돌아보면 조금 아쉽기도 하다. 프로젝트가 풀타임이 아니었음에도 하반기로 미룬 학위 논문 때문에 더 집중해야 했기도 하고 본격적인 기획, 견학, 문서작성 등 수시로 바뀌는 일정이 있어서 개인적인 시간을 따로 빼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2) 2021년 1학기 심사 및 경비 마련, 사실 이건 무슨 의미지? 하고 보았는데 박사 학위 하고자 할 때 들어가는 경비 등을 생각한 것 같다. 인쇄비 정도라서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활동이 적고 대학원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어서 3번 목표에 이어서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준비를 하려고 했던 듯 하다.
3번 목표 2021년 3000만원 저축
3000만원을 만들려면 산술적으로는 한달에 250만원씩을 모아야 하는 것인데, 당장 어디 취업을 해서 그 이상을 1월부터 12월까지 다녀야 만들어 낼 수 있는 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당시 비트코인이니 주식이니 한참 널뛰던 시절이라 잘만했다면 적은 종잣돈으로 얼마간의 수익을 보았을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프로젝트 수행을 하던 연구원 월급에 소소하게 펀드에서 들어온 수익이 전부라 3000은 못 모았다.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논문만 쓰는 게 아니라 소액이라도 꾸준히 경제 활동을 했으며 2022년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번 목표 57키로 책 100권
1) 개인적인 자존감 챙기기, 운동을 하고 관심 분야 외의 책을 두루 읽었으면 했다. 실제로 오큘러스 퀘스트를 구입하고부터는 트레이닝, 헬스 앱으로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고 저녁마다 수변로 산책을 했다. 가족 모두 산책을 나서기도 하고 혼자 후루룩 조깅을 곁드려 만보를 채워 오기도 했었다. 꾸준히 몇달을 하고나니 먹는 것도 신경을 쓰게 되고 삶의 질이 좋아졌다. 악세서리나 옷, 향수 같은 스타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활력있는 삶이 주변에도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것을 경험했다. 현재는 회사다니면서 4시간 통근하다보니 운동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어서 체증이 조금 불어난 느낌이다. 회사 점심시간에 산책을 다니기도 하고 회사 층까지 계단을 이용하기는 하는데 이 메모를 보고 나니 당장 오늘부터 아파트 헬스장에 가서 러닝이라도 40분은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은 부끄럽게도 사거나 빌려본 책이 100권은 커녕 20권도 안되었던 듯 하다. 논문이나 보고서, 연구 콘텐츠만 보다가 나머지 시간은 텍스트가 없는 시간이 더 좋았던 듯 하다.
2) 직접 음식해서 먹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와 손잡고 산책을 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이 있다. 이제 아이는 손잡고 산책은 기본이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제법 일상 대화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커버렸다. 가끔씩 다리아프다고 업어달라고는 하는데 이제는 부쩍 무거워져서 벤치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방법을 쓴다. 아이와 외출시 엄마아빠는 1+1이라는 법칙이 있어서 누군가 아이와 약속하면 다른 배우자는 그걸 따라야 한다. 한사람이 따라주면 다음에는 반대로 따라주는 데에서 연대감이 더 많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김에 다같이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추억도 쌓는 거지 머.
이렇게 돌아보고 나니 아주 당연한 것들인데 굳이 메모를 해서 노력을 기울인 것인가 할만큼 평범한 목표들이었다. 한편으로는 1번 목표때문에 생긴 2,3,4번 목표였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박사학위라는 큰 일을 앞두고도 내 삶의 균형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심사를 받아 학위기를 받는 과정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대학입시처럼 모든 것이 결정나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임계점을 시험하고 그것을 넘어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충분히 내부 에너지를 쌓고 그것을 통해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 그 다음의 상태에서 내 존재에 대한 것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을 터다.
다행히도, 2022년 2월 박사학위를 무사히 받았고, 강의는 하지 않지만 연구원으로 취업을 하였으며, 매달 꼬박 월급을 받아 적립을 하고, 이제 좀 더 긴장감있게 하루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운동하고 책을 보고 다음 임계를 향해 에너지를 채워나가고자 한다.
지금의 나를 진단하고 위기나 긴장에서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일정부분 긴장을 미래로 나누어 놓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마법이 있는 듯하다. 미래를 선명하게 그려두면 현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미래에 의심이나 불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메모를 다시 작성해보려고 한다. 나의 2022년과 2023년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