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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Mar 14. 2021

종수는 기우를 만난 적이 있을까.

<버닝>과 <기생충>, 이창동과 봉준호의 세계에 대하여.

“종수는 기우를 만난 적이 있을까.”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을 보고 난 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응어리지던 찝찝함을 해소해 준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문구다. 두 명의 한국 청년이, 한국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기괴한 힘. 그 힘의 근원은 어디일까. 먼저, 기생충의 경우부터 보자.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통해 장르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자신만의 기법을 최고조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지금 이 영화의 촬영지는 한국"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환기한다. 이를 조금 더 깊이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그의 영화적 특징을 살펴본 후, 기생충에서 이러한 특징들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봉준호의 카메라는 언제나 계급을 담는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를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계급 간의 불평등이라는 비극에 비틀어진 장르적 요소를 첨가하여 마치 이것이 희극인 것처럼 제시한다. 봉준호의 예술성은 이 지점에 있다. 사회파 감독이어서가 아니라, 독특한 장르적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희극과 비극의 간극을 무너뜨리는 경계에 말이다. 칸 영화제의 수상 직후, 봉준호 감독 스스로도 "나는 뼛속까지 장르감독이다"는 말을 남긴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봉준호를 바라볼 때 중요시해야 할 점은 영화가 담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메시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장르적 방법론에 있다. 

 

 흔히 삑사리로 표현되는 그만의 방법론은 계급구조의 말단에 있는 어리숙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루는 불완전한 연대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웃음을 중심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명백히 기억해야 할 점은, 언제나 그들의 연대는 실패, 혹은 도피의 결말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살인이 일어나고, 서울과 시골의 형사가 힘을 합쳐 찾고, 범인을 놓친다. 괴물이 나타나고, 가족이 뭉쳐 현서를 찾아다니고, 죽은 현서 대신 현서와 같이 있었던 아이를 가족으로 삼는다. 갑작스러운 빙하기의 도래 때문에 사람들은 열차에 올라타고, 연대하여 앞 칸으로 나아가고, 아시아 소녀와 흑인 소년만이 남은 채 모든 시스템이 붕괴된다. 옥자를 빼앗기고, 옥자를 찾으려 미자가 길을 떠나고, 희생되는 수많은 돼지들을 내버려 둔 채 새끼 돼지 한 마리만을 구출하여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내용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서사 구조이다. 


 또한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봉준호는 보수적 정치적 체계의 대안으로 진보적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에서 우리가 동일시하는 형사들은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고문했던 공안 경찰들이며, 대학생들 또한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경찰의 발을 각목으로 찍어 그를 불구로 만든다. <괴물>에서 미군은 한강에 자의적으로 독극물을 방류하는 등 주권국가로서 한국을 존중하지 않지만, 진보단체는 괴물을 퇴치하기 위한 독가스 살포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특이한 사람들’로 연출될 뿐, 박강두 가족과 직접적으로 연대하는 대안세력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설국열차>에서 계급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윌 포드를 처치하려는 민중의 대변자 커티스는‘체계의 유지’라는 점에서 그와 타협하고, 결국 그러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마약에 취해있는 남궁민수다. 육식의 공업화를 비판하는 <옥자>에서 동물해방 주의자들은 토마토 또한 생명이라며 먹지 않는 기괴한 모습과 단체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내부의 집단 린치를 묵인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것이 봉준호의 영화가 '정치적'이지만, '정치세력'을 비호하는 프로파간다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이상의 특징들을 정리하자면, 한 마디로 봉준호는 양비론적 회의주의자다. 그는 하층민의 연대와 삶 속의 해학들을 즐기고, 그것을‘인간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시에 봉준호는 그들의 연대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사회 시스템이나 정치세력은 그들을 완전히 도와줄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비극이 희극이 되고, 희극이 비극이 되는 역전의 순간이 일어난다. 사회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비극이 있다. 그리고 그 비극은 결코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역설적인 희극이 있다. 그것들이 섞인다. 여기, 영화가 나온다. 이것이 봉준호가 영화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그리고 '봉테일'이라는 개념은 미디어에서 종종 봉준호 감독이 리얼리즘 작가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나오는데,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봉준호는 리얼리즘 작가가 아니다. 차라리 '봉테일'이란 별명은 극적이고. 운명론적인 촬영 방법과 스토리를 통해 그의 작가론을 표현하는 방법을 일컫는다고 봐야 한다. 그의 영화 속 인과관계는 철저히 봉준호의‘계획’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봉준호가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낸 작품인 <설국열차>의 소재가 정해진 선로만을 달리는 열차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마치 철로처럼, 봉준호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마주치는 사건들은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에서의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그리고 그 순간 봉준호는 자신의 작가적 능력이 최고조로 표현되는 순간, 즉 마틴 스콜세지가 말한 의미에서의 시네마적 순간을 만든다. 


 반드시 박두만(송강호)의 아내와 서태윤(김상경)이 만났던 여학생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쳐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봉준호는 살인자의 시점 쇼트로 그 둘의 생명이 결정되는 서스펜스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드시 박강두는 총알의 개수를 잘 못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봉준호는 달려오는 괴물과 아버지의 손짓 사이의 애상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드시 꼬리칸 사람들과 윌포드의 경호원들이 집단적으로 싸우기 직전에, 기차를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봉준호는 꼬리칸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전달되는 혁명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삑사리라고 불리는 부분들은 사실 영화적 순간을 포획하고 싶은 봉준호의 치밀한 계획인 것이다.


 그리고 <기생충>. 그리고 기우. 봉준호의 영화적 기법은 <기생충>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기우는 반드시 산수경석에 맞아야 한다. 민혁은 그의 친구들 중 다른 누구도 아닌 기우를 찾아와야 하며, 문광은 다른 순간도 아닌 기우네 가족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와야 하며, 기택은 반드시 인디언의 모습을 한 채 박 사장을 찔러야 한다. 봉준호의 모든 영화는 마치 히치콕의 영화들처럼 감독에 의해 정교하게 직조된 하나의 소우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봉테일’이라는 그의 별명은 리얼리즘적 성향을 가리키는 ‘디테일’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차라리 그는 표현주의 감독,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연극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기생충의 인물들의 대사나 공간, 그리고 촬영 방법은 마치 하나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변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배우는 다름 아닌 송강호인데,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로 대표되는 초반부의 대사들은 <살인의 추억>에 나온 대사인 “논두렁에 꿀 발라 놨나”, “여기가 무슨 강간의 왕국이냐?”에서 느껴졌던 감정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다. 또한 ‘믿음의 벨드’ 음악에 맞추어 기우네 가족이 박 사장네 가족으로 하나씩 침투해가는 장면은 말 그대로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나 볼법한 연출이었다. “그래도 사모님을 사랑하시죠?”라는 대사와 함께 천천히 패닝하며 박 사장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은 리얼리즘의 발현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차라리 뮤지컬의 스포트라이트 전환에 가깝다. 이러한 변화를 보며 나는 박찬욱 영화를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기생충이 봉준호의 전작들보다 <올드 보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과장되고 작위적인 연출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봉준호의 변화나 후퇴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봉준호 영화의 핵심은 비극과 희극의 교차이며, 이러한 그의 성향은 당연히 표현주의적인 방법에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봉준호의 이러한 변화를 방법의 전환이 아니라 본질의 발현이라고 보고 싶다. 이것은 차라리 봉준호라는 세계의 완성이며, 그의 작가의식이 오롯이 표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비극과 희극의 사이에서 치밀하게 계획된 세계를 만들어내는 조물주. 이것이 가장 명징하게 나타나는 장면이 바로 홍수로 초토화된 기우네 동네를 롱테이크와 부감 숏으로 전시하는 장면인데, 이 순간 카메라의 시선은 기생충이라는 소우주의 조물주인 봉준호의 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봉준호는 자신이 정교히 건축한 세계 사이의 조그마한 틈새로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을 주입시킨다. 정교하게 직조된 봉준호의 이야기는 문득 관객에게 영화의 사건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하도록 한다. 반지하라는 독특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기우네 집은 물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만 카스테라가 붐이 일어나고 언론의 오보로 망하지 않았다면, 기택은 운전기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짜파구리와 한우 채끝살로 계급론을 논할 수 있는 공간은 한국뿐이다. 부조리극, 연극, 우화처럼 보이는 <기생충> 속의 이러한 작은 균열들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공간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즉, 봉준호는 자신만의 장르적 세계를 정교하게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이곳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한국이라는 사실을 절묘하게 폭로한다. 그 사이에 놓인 우리가 느끼는 약간의 불편함과 기시감. 그것이 봉준호 예술의 본질이며, 그 순간 봉준호의 영화는 ‘한국영화’가 된다.


 그렇다면 이창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카메라는 형이상학적이다. 그는 세계의 근원적인 불합리 앞에 서 있는 단독자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창동은 인간의 본질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고, 이를 위해 모순과 고통과 불합리한 구조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고통받는 인물들의 옆에서 그들을 정관 한다. 이러한 그의 물음은 그의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에서 농촌과 도시 사이의 분열을 보여주는 리얼리즘으로 표현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파괴된 영혼을 다루는 <박하사탕>을 통해 한국의 역사로 확장되었다가, 유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몰락과 구원을 다룬 <밀양>과 <시>라는 작품을 통해 점점 관념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의 카메라는 언제나 관찰자의 역할만을 담당한다. 공중전화 박스에서의 통화와 기차의 역주행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요소로 인물의 비극을 연출한 초기작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서도 그러했고, 칼로 손목을 긋고 거리로 나와 살려달라고 흐느끼는 신애의 모습과 자신의 손주가 성폭행한 여자아이가 자살한 다리 위에서 시를 읊는 미자의 모습을 담은 <밀양>과 <시>에서도 그러했다. 영화는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으며 클로즈업도, 롱숏도 허용하지 않고, 슬프다 못해 잔인한 자리에서 미디엄숏으로 인물이 흘러 다니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말하자면 이창동은 창자를 끊는 아픔, 단장의 고통으로 그들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그곳에서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 인물을 통해 렌즈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담아내려고 한다. 이창동은 파괴와 무너짐의 관찰자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창동의 영화는 장르적으로 규범 하기가 어렵고, 차라리 한 편의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창동이 집중하는 것은 봉준호가 추구했던 요소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감독의 의도가 작품 속에서 필연으로서 정교하게 드러나는 것과 인물과 사건이 만남으로써 발생하는 장르적 쾌락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창동의 세계는 우연과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인물이 만나는 사건은 절대자인 감독의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감독조차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없고, 극복하지 못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절대자가 봉준호 자신이라면, 이창동의 영화에서 절대자는 사건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시적인 세계를 관통하는 봉준호의 시각과는 달리 이창동의 시각은 거시적이고, 역사적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전두환 정부는 인물들의 고통의 숨겨진 원인과 배경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관객들은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이 영화의 배경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하지만 <박하사탕>에서 전두환 정부는 부조리 그 자체다. 그것은 숨겨진 원인이 아니라 현존하는 불합리이며,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 직접적으로 인물과 부딪힌다. 영화 외적인 추론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을 환기시키는 봉준호와 달리 이창동은 세계 속에 현존하는 불합리를 영화적 이미지로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설경구)가 잡은 총의 이미지와, <초록 물고기>에서 막둥이(한석규)가 절규하는 개간된 농촌의 배경은 관객에게 직접적인 이미지로서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이창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밀양>과 <시>에서는 종교적 구원과 죄, 그리고 예술의 관계에 대해 다루며 한국이라는 배경에서는 멀어져 갔고, 그곳에서 이창동은 물질에서 관념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버닝>이 나왔다. 우선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버닝>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영화로 계급이라는 주제에서 일시적으로 기생충과 접할 뿐, 모든 분야에서 기생충과 주제가 같은 것은 아니다. <버닝>이 다루는 것은 인간 인식, 그중에서도 인과관계와 은유를 관통하는 언어의 불완전함과 그로 인해 느끼는 인간의 불안과 실존의 경험이다. 이러한 문제는 ‘눈물이 슬픔의 증거가 될까?’, ‘계속해서 걸려온 전화는 종수의 어머니가 건 것일까’, ‘우물은 존재할까’, ‘벤이 혜미를 죽인 것일까’와 같은 질문들과 질문들 앞에 직면한 종수의 얼굴로 영화를 가득 채우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이창동은 한국으로 귀환한다. 인간의 인식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현세대의 청년의 삶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유비 관계를 통해 <버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 두 세계 사이의 유비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극 중에서 사용되는 ‘메타포’이며, 이를 통해 이창동은 초기 영화에서 보여준 부조리의 이미지화와 후기 영화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종합하는 데 성공한다. <버닝>은 그러한 점에서 이창동의 완성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벤과 그의 차에 가려 벤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수 있는 종수의 이미지, 배달원을 뽑는 간단한 면접에서도 지역, 대학, 스펙을 묻는 면접관의 날카로운 목소리, 이주민 여성과 한국인 노인이 거주하는 쓰러져가는 파주의 집들과 헬스장과 식당들로 넘쳐나는 서울의 빌딩. 혼란과 단절로 가득 찬 이미지들은 자신이 한국을 표현하고 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이창동의 근원적 질문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한국영화’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두 감독의 시선이 2019년 대한민국 청년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을 살펴보고 싶다. 물론 계급구조의 밑에 있는 인텔리적인 남성이 대한민국의 청년 세대를 대표할 수 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고, 나 역시 어느 정도 그러한 비판에 동의한다. 하지만 두 감독이 2019년에 2019의 한국 20대에 대한 이야기를 동시에 써 내려갔다는 것은 두 감독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기생충>의 기우와 <버닝>의 종수는 그들 아버지 세대, 즉 봉준호와 이창동이 카메라를 통해 맞서 싸웠던 세대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으며, 또 그들은 무엇을 망각했는가. 우리는 이제 두 감독의 작가정신을 완성시킨 두 영화에서 두 청년이 부딪히는 삶의 사건과 그것에 대한 인식에 대해 비교해보고, 공감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이창동과 봉준호가 담아내고자 했던 지정학적 대한민국이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종수와 기우는 만난 적이 있을까.”


 종수와 기우는 2019년의 대한민국을 청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서울 변두리의 반지하에서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기우와 파주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생활하며 물류 운송 일을 하고 있는 종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대, 세대, 계급이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작 씬이 두 영화에서 모두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지금은 2019년 대한민국이며, 그 속에서 생활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며, 그들은 모두 가난이라는 벽에 막혀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감독의 공통된 선택. 그 속에서 두 청년은 자신의 노력 유무와는 관계없이 주어진 환경에 무기력하고, 그것에 대해 분노한다. 그렇다면 먼저 던져야 할 질문. 그러한 분노의 감정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당연히 혈통으로부터가 아닐까. 작품들의 아버지들은 모두 무기력하거나 분노한다. 기우의 아버지인 기택은 각종 창업과 잡일을 했지만 백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무계획’의 무기력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에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한다. 그는 월남전 참전 용사이지만 그의 동료들이 강남에 땅 투기를 시작할 때 그는 파주로 돌아와 소를 키우며 축산업을 시작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는 소 값의 폭락과 함께 망해버리고, 그는 사무소에서 공무원을 폭행해 재판을 받는다. 무기력과 분노. 윗세대에서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세대를 걸쳐 유전되고, 자식 세대에서 반복된다. 비극은 그곳에 있다. 기우는 3수생이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졸업 후 취업도 못하고, 소설을 쓰지도 못한 채 물건을 나르며 살아간다. 기우는 살충제를 들이쉬며 피자 상자 접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종수는 산업화의 상징인 남산타워에 반사된 불빛을 쳐다보며 오랜만에 만난 여자 동창 혜미와 섹스를 한다. 그것은 차라리 늪이고, 벗어날 수 없으며, 좋든 싫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만을 감각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다.


 그러던 도중 그들은 만난다. 기우는 대학생 친구 민혁을 만나고, 그로부터 과외를 의뢰받는다. 종수는 혜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남자, 벤을 만나고 그와 혜미가 다니는 여행에 잠시 끼어 다닌다. 그런데 그들은 각각 마주친 사건에 대해 서로 상이한 반응을 보인다. 기우는 입버릇처럼 ‘상징적이다’는 말을 반복한다. 상징. 기우는 대상에 ‘허구’적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을 즐긴다. 기우는 추구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징은 자신의 현실과 상상을 이어 줄 수 있는 도구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종수는 벤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은유, 즉 메타포에 고민한다. 하지만 메타포(은유)에 대한 종수의 반응은 항상 애매하고, 확실하지 않다. 그에게 은유는 단절을 실감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화자에 따라 달리지는 의미. 종수는 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환기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만남’ 이후에 상이한 결정을 내린다. 기우는 민혁의 상징을 수용하고, 오히려 그 상징을 확장해간다. 민혁이 기우에게 선물한 산수경석은 기우네 가족과 민혁네 가족의 위치를 상기시키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민혁네에게 돌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지만, 기우네에게 돌은 충숙의 말처럼 ‘먹을 것’이 아니며, 교환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그냥’ 돌이다. 하지만 여기서 기우는 도약을 감행한다. 정확히는, 민혁의 자리로의 도약을 감행한다. 그는 3수생 기우가 아니라 연세대를 졸업한 케빈이 되고, 그 범위를 넓히며 기정과 기택, 그리고 충숙을 모두 자신의 상징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시각, 종수는 도약의 간극에 두려움을 느낀다. 희망 없이 살아오다 마주친 혜미, 배고픔에 지치는 ‘리틀 헝거’보다는 삶의 근원적 의미를 추구하는 ‘그레이트 헝거’를 갈망하는 혜미에게 종수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혜미를 가져가 버리는 부유하면서 의문으로 가득 찬 남자, 벤의 등장으로 종수는 무기력해진다. 종수는 파주의 소들을 관리하고, 벤은 스테이크를 굽는다. 종수는 대남방송을 들으며 생활하고, 벤은 클래식을 들으며 생활한다. 종수에게 은유는 이해할 수 없고 다가설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파국이 닥친다. 박 사장의 마당을 가로지르는 번개 한 줄기는 기우가 구축해둔 상징들을 처참하게 붕괴시킨다. 그리고 그 붕괴의 기저에는 문광의 가족이 있다. 기우의 상징이 붕괴된 곳에, 기우의 현실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박 사장의 숨겨진 지하실에서 기우가 마주하는 것은 문광네 가족이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과 계급적 위치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일한 계급이면서도 연대하지 못한다. 언니라 부르며 충숙을 따르는 문광과 선을 긋고,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냐는 기택의 질문에 반지하까지 합치면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도 많다고 대답하는 근세(문광의 남편)와 선을 긋는다. 그 차가운 봉준호의 냉소. 기우네 가족은 마주친 실재를 외면한 채 끝까지 상징을 택한다. 그러면서 기우네는 지배자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질서는 흔들려선 안 돼. 그런데, 누구의 질서 말인가? 문광네가 가족 사기극을 들킨 기우네를 협박할 때 기택이 외친 말은 박 사장님이 얼마나 걱정하시겠냐는 호통이다. 근세는 박 사장이 퇴근할 때마다 이마로 전등을 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런 박 사장은 기택의 냄새를 혐오하고, 박 사장의 아들인 다송이에게 근세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원인이다. 말하자면, 같은 공간에 두 개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세계의 대립은 당연하게도 박 사장의 승리로 끝이 난다. 애초에 기우의 세계는 생산수단에 바탕을 내리지 못한 허구적 상상에 불과했기에. 허락 없이 도약을 감행한 기우네의 상징은 그 단절의 힘에 의해 산산이 파괴되고, 그들은 똥물이 역류하는 그들의 집에, 그들의 세계에, 그들의 현실에 도착한다. 비극은 그곳에 있다.


 종수에게도 파국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혜미의 실종. 어떠한 증거도,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증발’해버린 혜미를 찾아 종수는 벤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수는 혜미의 대체물처럼 보이는 또 다른 여성과 그의 친구들을 만나고 있는 벤의 ‘유흥’을 직시한다. 그리고 종수는 벤의 메타포를 생각한다. 심심할 때마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 종수는 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메타포와 온몸으로 부딪힌다. 그는 매일 아침 파주 시내를 달리며 비닐하우스들을 확인하고, 벤의 뒤를 쫓으며 그의 일상을 감시하며, 혜미의 행방을 찾으려 서울을 방황한다. 하지만 그 부딪힘의 과정에서 종수에게 남은 것은 종수가 용산참사가 그려진 그림을 보는 동안 건너 쪽의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를 가지는 벤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이다. 그 자리에서 종수는 메타포라는 벤의 세계에 무릎을 꿇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파주의 집으로 돌아온다. 비극은 그곳에 있다.


 결국 종수와 기우는 각각 은유와 상징에게 패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수는 은유의 계급성으로 인해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기우는 상징의 계급성으로 인해 '무한한 투쟁'의 상태로 들어간다. 기우는 계속해서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고, 계획을 생각한다. 기우에게 상징이란 How, 즉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상승할 것인가의 문제. 아버지, 저는 이게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그런데 어쩌나, 기우의 계획은 희극이었지만 봉준호의 계획은 비극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종수에게 은유는 Why, 즉 이유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왜 알 수 없는가의 문제. 난 심심할 때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왜요? 그것들이 태워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어쩌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비닐하우스와 혜미는 보이질 않는데. 이창동이 던져주는 사건들은 결코 인과관계의 확신을 얻을 수 없는 것들뿐인데 말이다. 상징과 은유로 표상되는 계급의 울타리를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던 두 청년은 자본주의가 한국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장악하고, 그들의 삶을 해체시키는 그곳에서 결국 무릎을 꿇는다. 다시 한번, 비극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청년들은 분노한다. 기우는 산수경석을 들고 근세를 죽이기 위해 내려간다. 그 순간 기우에게 산수경석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상징의 마지막 보루이지만, 그 산수경석이 반대로 기우의 머리를 내려칠 때, 그것은 상징의 질서와 힘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기우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실재이며, 한마디로 ‘그냥’ 돌이다. 그리고 그때 기우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는, 다른 누구도 아닌 기우의 피이다. 마찬가지로 벤의 집에서 혜미가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시계를 발견했을 때, 보일이라는 이름의 벤의 집에 살던 고양이가 반응을 보일 때, 종수의 세계는 무너진다. 혜미가 차던 시계와 같은 종류의 시계가 벤의 집에 있다는 것과 고양이가 종수의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혜미를 벤이 죽인 것 같다는 심증을 유도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명하게 증명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그 순간 종수는 깨닫는다. 메타포는 작가만이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벤의 세계 속에서 종수는 그저 물류를 운송하는 노동자일 뿐, 그 어느 명제나 사건도 확신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종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뒤로 가면서 종수 뒤로 펼쳐진 서울의 빽빽한 아파트들을 조명한다. 그곳에는 또 다른 종수들이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메타포를 가지고 세계와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만의, 소설 속에서 말이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와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풍경은 무엇인가. 그곳은 지구이고, 대한민국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한국이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청년은 분노하고 피를 뒤집어쓴다. 진정한 비극은 그곳에 있다. 두 감독은 서로 다른 인물에게 사건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만나는 대상이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다름에도 대한민국의 영토 위에서 두 청년은 살인과 마주한다. 이 기묘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 이것은 차라리 지독한 회의주의다. 기우와 종수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거나, 체념으로 인해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냉소다. 


 그리고 두 영화는 모두 에필로그를 보여준다. 기우는 웃는다. 마치 그는 자신을 취조하러 온 경찰 앞에서 웃고, 기정의 죽음 앞에서 웃는다. 불현듯 떠오르는 조커의 웃음. 비극은 희극이었다. 그 역전의 순간, 말 그대로 희비극의 순간에 기우가 느꼈을 무기력과 분노를 생각해본다. 그래서 기우는 또다시 계획을 세운다. 돈을 많이 벌고,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계획을. 하지만 봉준호의 세계를 뛰어다닌 기우는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질서 안에서 그의 계획은 무계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봉준호는 차갑다 못해 잔인한 기우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순간 심장을 스치듯 느껴지는 불편함과 모욕감.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종수는 태운다. 그는 벤을 불러내고 그를 칼로 찌른다. 월남전에서 공산주의자를 죽이던 칼로 벤을 찌른다. 그리고 그의 시신과 그의 차를 함께 태우던 종수는 그의 옷마저 전부 벗어 같이 태워버린다. 그리고 한 겨울에 나체로 선 종수는 자신의 트럭으로 돌아가 성에가 가득 낀 앞 유리창을 닦으며 운전을 시작한다. 이것은 차라리 승화다. 이 장면은 종수의 꿈일까? 종수의 소설 속 내용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창동은 이 순간 종수가 느꼈던 무력감과 분노를 관객에게로 확장시킨다. 종수의 살인과 도망을 지켜보는 당신, 제가 만든 영화적 질서조차 확신할 수 없는 당신은, 지금 어떤 질서에서 살고 계십니까? 불확실성으로 영화 자체를 승화시켜버린 이창동의 도발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자각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허허벌판이 된 논 옆에 따닥따닥 붙어있는 아파트와 마트들.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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