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롤로로 Mar 02. 2021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의 첫 장면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는 치히로의 울적한 몸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곤 치히로네 가족은 길을 잘 못 들어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산으로 들어가는 차의 모습을 멀리서 잡은 하야오는 그 이후 카메라를 위로 이동시키며 앙상하게 말라있는 고목을 보여주고, 영화의 제목을 띄운다. 커다란 고목의 이미지와 나무가 위치한 공동체 속의 여성의 이미지는 하야오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한 대표적인 은유다. 하야오의 영화는 일관되게 나무와 자연을 통해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찬송과 그 생명의 힘을 유지하거나, 발산하려 하는 여성의 투쟁에 대해 다루어왔다. 그러니까, 하야오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려 하거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벼량 위의 포뇨), 조력자와의 도움을 통해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하려 하는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역할을 부여받으며, 그 과정에서 언제나 여성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마녀 배달부 키키, 이웃집의 토토로). 그리고 하야오 영화의 이러한 특징이 총체적으로 종합된 작품이 바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하지만 치히로네 가족이 바라본 고목은 이미 시들어 있다. 이는 토토로와 아이들이 밤새 힘껏 나무를 피워 올리던 과거의 히야오와는 다른 시각이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또한 치히로네 가족이 터널을 건너 도착한 곳은 근대 서구에서나 볼법한 건축 구조를 가진 기차역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천장의 샹들리에와 외벽의 큰 시계는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발아하던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일본이라는 공간으로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근대의 상징인 기차역을 모방한 일본의 공간. 이미 지나가버린 점에서 이제는 거짓이 되어버린 시간과 그곳은 서양의 어느 나라가 아니라는 점에서 거짓이 되어버린 공간, 그러니까 거짓 속의 거짓으로 그들은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기차역을 나와, 이미 말라버린 개울을 지나, 치히로네 가족은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은 일본과 서양의 건축이 기괴하게 혼합되어 있는 곳이고, 말라버린 개울을 대신에 어디에나 '기름(油)'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마을이다. 그러니까 그곳은 마치 일본인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이 아 공간이다. 그들은 한문을 쓰고, 한문을 히라가라를 통해 읽지만, 그들은 일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에 거짓에 거짓이 더해지는 공간. 그곳은 그 사이의 어딘가이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치히로네 부모님은 식당에 자리 잡아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현금이고 카드고, 모두 있'기 때문에. 그들은 가계 주인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치히로네 부모님에게,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타자는 전인격적으로 매개되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화폐를 통해 간접적으로 매개되는 익명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화폐는 그곳에서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치히로네 가족이 도착한 마을이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하고 있는 공간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물질과 향락에 대한 괴물들의 관심은 현실 사회의 우리의 욕망보다 더욱 커 보인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치히로네의 '화폐'가 더 이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동일한 자본주의 체계를 공유하는 사회에서도 공동체에 따라 가치를 가지는 화폐가 다르다. 이런 다소 모순적인 상황은 화폐의 허구성을 직접적으로 저격한다. 화폐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 매개체이지만, 자본주의라는 사회 속에서 인격을 매개하고, 정체성을 구현하는 존재로 신격화된다. 하지만 바로 그 화폐의 본질은 터널 하나를 건넌 공간에서는 통용되지 못하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화폐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화폐를 진실로 만들어 주는 것은 더 큰 거짓말이다. 거짓말 속의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 한 채 음식을 먹기 시작한 치히로의 부모는 따라서 벌을 받는다. 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거짓의 거짓의 거짓의 거짓 속에 내던져진 치히로의 부모님은 결국 진실의 저변에서 추락해 인간이라는 존재로부터 추방된다.


 그렇기에 치히로는 이 세계에서 진실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 진실을 찾는 순간만이, 여러 겹으로 쌓인 거짓의 층계를 뚫어 부모님을 구하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에.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 진실의 여정에는 치히로를 처음 보았음에도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하쿠가 함께 할 것이다. 하쿠의 도움을 받은 치히로는 '가마 할범'의 도움을 통해 유바바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목욕탕과 음식점으로만 보이던 유바바의 여관에 사창가로 보이는 층도 있음이 간접적으로 묘사된 점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여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일한다기보다는 유바바가 무서워 일하는 것처럼 보이며, 활발한 듯 보이는 여관의 모습은 곳곳에서 자뭇 퇴폐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치히로는 유바바와의 만남에서 그 원인이 '이름을 가져가는 것'에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신화나 성경에서 이름을 가져갈 수 있는 자는 신뿐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려준 야훼처럼, 오직 신만이 인간에게 특정한 이름을 부여하여 그를 칭송하거나, 혹은 영원히 고통받도록 박제시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바바와의 계약에서 그녀가 치히로의 이름을 가져간다는 점은 그 공간에서 위치한 유바바의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마법을 통해 신의 경지에 있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이는 치히로의 부모와 같이 '터널 건너의 세계'로 넘어온 사람들이 석탄이나 돼지로 변해있음을 암시하는 곳곳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이름은 권력인 동시에 정체성이다.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름은 언제나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성립 가능한 하나의 믿음이며, 체계이고, 상상계이다. 이렇게 이름은 관계를 전제함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미, 즉 정체성을 구성한다. 최초의 이름들이 직업명과 사는 지역을 더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름이 관계 구성원에게 자신의 성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깊은 마음'이라는 뜻의 '치히로(千尋)'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치히로는 유바바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인 숫자 천, '센(千)'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렇게 현실 세계의 친구가 써준 이별 카드가 아니었으면 잊어버렸을 그 이름, 치히로를 찾기 위해 센은 불완전하고, 미지의 안개로 가려져 있는 여관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센의 여관생활은 여타의 직원들의 생활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는 노동에 대한 직원들과 센의 인식이 다른 점에서 기인한다. 직원들에게 노동은 곧 돈이다. 그들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노동을 금이라는 화폐와 교환한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노동은 오직 교환을 위한 가치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적은 노동이 아닌 자본에 있으며, 노동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센에게 노동은 생존 그 자체이다. 남들에 비해 생존에 능하지 않은 센에게 노동은 미래에 올 향락을 보장해주는 자본을 향한 매개체가 아니라, 눈 앞에 놓인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힘과 시간을 들이는 활동 자체가 센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며, 그 활동의 하나하나는 센의 일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하야오는 그렇게 인간과 하나가 되는 노동에서 우리의 미래를, 그만의 '오래된 미래'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오물 신과 비슷한 흉측한 모습이 되어버린 강의 신은 그렇게 자신의 노동과 하나가 된 센의 노력을 통해 구원받는다.


 여기서 강의 신과 센의 노동의 성질과 정반대 되는 위치에 놓여있는 인물이자, 여관의 모든 인물,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그것', 가오나시가 등장한다. 가오나시. 즉 얼굴 없는 귀신이라는 부정 명사는 곧 무한한 익명성을 가진 우리의 얼굴과 닮아있다. 아무런 얼굴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은, 아무런 얼굴이나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가오나시가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 형체를 결정하는 방법은 관계를 통한 복제를 통해서다. 그러니까, 이 가오나시라는 존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관계라는 관념을 그대로 물화한 것처럼 보인다. 가오나시의 행동은 언제나 타인의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센이 카운터에서 필요로 한 부적을 가득 가져다주고, 이후 사람들이 원하는 사금을 마음껏 가져다준다. 하지만 라깡이 현대 사회를 관찰하며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시대'라고 말한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이 존재를 움직이는 추동력, 그것은 뼈저리게 서글펐을 외로움이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가오나시는 센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센에게 '그렇게나 많이'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센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들로 하여금 추동하게 만들었던, 스스로의 욕망이 아니지만 어느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될 것처럼 보였던, 그 욕망의 순환고리를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센은 성장한다. 신화학자 조지프 켐벨은 그의 저서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영웅 서사가 가지는 여러 가지의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특징을 정리했는데, 이 중에서 본인이 영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들이 밝아가는 단계로는 '계시', '혼란', '조력자', '고난 극복'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이를 센의 서사에 대입하여 본다면, 강의 신으로부터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받은 경단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센의 마음은, 분명 치히로의 그것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센은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데, 이때 사용하는 교통수단이 기차라는 점은 생각해 볼만 한 점이다. 센은 '터널 너머의 공간'으로 오며 기차역에서 먼저 도착했었다. 기차는 시간을 전제로 존재한다. 단순히 해의 위치를 어림잡아 만든 시간이 아니라, 분과 초를 나누어 계산하는 정교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전근대와 근대를 갈라놓는 마지막 연결고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시간. 전근대의 시간은 차이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었기에, 하나의 존재라기보다는 존재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벼가 자라며, 가을에 벼를 추수하고, 겨울을 견디어 내는 것. 이 시간의 반복 속에서 시간은 분과 초가 아니라 봄과 여름의 차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근대의 시간은 존재 그 차제가 된다. 1초, 1분이라는 임의적인 구분 자체가 마치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차를 타고 계속해서 반대쪽으로 나아가던 센은 시계가 고장난 어느 농촌에 도착한다. 이는 센이 근대에서 전근대의 사회로 넘어온 것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 욕망의 순환고리에서 자아와 일체 된 노동을 통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 센만이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연출이 있는데, 센이 여행을 떠난 후, 유바바를 만난 하쿠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정신을 못 차렸냐'라고 그녀에게 일갈하자, 유바바의 시선이 슬그머니 자신이 책상에 쌓아둔 사금으로 향했다가 다시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후, 그 표정이 놀라는 표정으로 바뀌고, 자신의 아기방으로 달려가는 연출이 바로 그것이다. 이 미묘한 연출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는데, 유바바라는 인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효율적인 연출이면서,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굉장한 충격과 자극을 주는 좋은 연출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네바의 집에 도착한 센 일행은 그녀로부터 센이 하쿠의 저주를 이미 풀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제네바는 시간이 없는 어느 농촌의 허름한 집에서 스스로 노동한다. 그녀는 '마법으로 만든 건 모두 가짜'라며 스스로 바늘과 실로 옷을 만들고, 그중 머리띠 하나를 센에게 선물한다. (이 과정에서 유바바의 '멸균실'에 갇혀 있던 아기가 헴스터로 변해 수레바퀴를 굴리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렇게 여관에서 벗어난 시골의 어느 집에서, 센은 자신의 성장이 이제는 타인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언제나 가슴 아린 장면의 연속. 센이 목소리 높여 하쿠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 하쿠는 센의 눈 앞에 '스스로' 등장하고, 둘은 비상한다. 그리고 센이 하쿠의 진짜 이름이 '코하쿠'임을 알려주는 순간, 둘을 매개하는 것은 '물'이다. 물이라는 액체의 속성과 영화의 속성을 비교하는 담론은 김병규 평론가가 잘하고 있으니 굳이 내가 건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자주 사용하는 '액체성', '감각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앞서 직관적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물에 관한 영화임을 느낄 수 있다. 물은 경계가 없다. 물은 서로가 서로를 통과할 수 있고, 투명하게 마주 볼 수 있으며, 서로가 이어지는 공간이다. 어쩌면 센이 자신의 모험을 통해 성장했다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이라는 외적 경계를 넘어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치히로'에) 물과 같은 투명함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센은, 아니 치히로는 다시 한번 유바바의 여관으로 가는 다리 위에 선다. 치히로의 앞에는 자신의 부모님이 섞여 있다는 돼지 무리가 돌아다니고 있다. 기회는 한 번. 하지만 기억할 것. 마법으로 만든 것은 모두 가짜라는 것을. 치히로는 자신의 답은 '여기에 없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유바바의 질서에 대한 거절이다. 유바바가 제시한 무리에는 더 이상 치히로를 위한 답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치히로는 더 이상 유바바의 질서 속의 센이 아니라 스스로 이름을 되찾은 치히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치히로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단계를 거친 치히로는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마법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제네바가 '스스로' 만들어 선물한 머리띠만을 가진 채.


 하야오는 언제나 그랬듯이 여성과 자연의 힘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다만, 그의 첫 작품인 <이웃집 토토로>에서의 여성들이 토토로라는 '생명'으로부터 구원받는 과정 속에 있었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여성은 스스로의 이름을 되찾는 용기를 가진다. 아름다운 색감과 작화 표현은 여전하지만, (그러니까, 여전히 사랑스럽지만,) 하야오의 여성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가 서서히 펼쳐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또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해 이동진 평론가가 남긴 글을 요약해서 울리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그는 그녀를 보고 싶고,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마지막 순간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의 롯 또한, 소돔과 고모라에서 탈출하던 중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 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러운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서 유사한 전설이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 일지도 모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