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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롤로로 Mar 02. 2021

죄와 벌의 도둑맞은 구원

합리주의, 신비주의, 회의주의를 중심으로

 인간은 어떻게 무언가를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인류가 지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새로운 답변들을 요구하는 풀리지 않은 문제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 다 다르겠지만, 나는 다소 과격하게 각자의 답변을 세 가지 분류 정도로 범주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부류는 인간 이성의 탁월한 활용을 옹호하는 합리주의자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이성을 넘어선 신적 존재에 의존하는 신비주의자들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류는 신과 이성 모두의 불완전성을 바탕으로 한 회의주의자들이다. 합리주의자, 신비주의자, 회의주의자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으나, 그 뿌리는 모두 인간의 앎의 기본 전제 조건을 탐구한다는 공통된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 사고방식이 다른 두 부류의 사고방식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죄와 벌]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살아있는 개체라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으로 바라본 물화한 이념들로 보이기 때문인데, 특히 앞서 말한 부류의 인간 유형이 작품 속에 모두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죄와 벌]에는 세 가지 종류의 가족들이 등장하는데, 마르멜라도프의 가족, 라스콜니코프의 가족,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가족이 바로 그들이다. 내가 굳이 각 가정에서 가장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을 중심으로 가족들을 이름 붙인 이유는 이 소설은 세 남자의 행동들을 통해 진리로부터 벗어난 인물의 각기 다른 부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각 신비주의자, 합리주의자, 회의주의자를 대변하며, 이러한 특징은 이들이 여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그린 구원의 이야기가 일정 부분 유의미하며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지만, 동시에 그의 철저한 가부장적, 정교적 사고는 마땅히 여성의 것이어야 할 구원을 훔쳐버렸다고 생각하며, 결과적으로 라스콜니코프가 도달한 구원이 사실은 도둑맞은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


 우선 마르멜라도프의 경우부터 살펴보면,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인 카체리나와 딸인 소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 알고 있는 인물임에도 술과 도박으로 인해 가족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간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자신의 행위가 곧 파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잘못과 불완전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불완전성을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신의 자비와 구원을 바라면서도 정작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류의 대부분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그가 가진 성과 속의 이중적 속성은 각각 카체리나와 소냐에게 분유된다. 카체리나는 그녀의 남편과 동일한 파멸적인 결말에 이르는데, 애석하게도 카체리나의 죽음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독자가 그녀의 죽음을 통해 소냐의 삶을 걱정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소냐일 경우, 그녀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인 매춘부임에도 집에 성경이 있으며 직접 라스콜니코프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도 하면서 성녀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에서는 김승옥 작가가 주로 사용한 ‘창녀의 성녀화’ 작업에 가깝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여성들이 남성 주인공들의 자기세계 형성을 위한 징검다리, 그 과정에서의 도피처와 안식처로 인식되는 것처럼 소냐는 어디까지나 마르멜라도프와 라스콜니코프 모두의 자아 형성을 보조하는 역할로서 자신을 희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그녀의 아이들 또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점 역시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반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라스콜니코프는 인간의 합리주의적인 면을 대변한다. 그는 세계를 이성을 통해 발견하는 법칙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당대의 합리주의적 물결과 그것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은 인물의 극단적 면모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법칙을 넘어설 수 있는 자, 법칙에 제약되지 않는 자를 상정하고 자신이 그러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그의 모습은 기존에 종교의 영역에 해당했던 부분들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합리주의자들의 면모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정교도로서,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인간의 시도를 자만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라스콜니코프는 궁핍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과외 강사로 더 일할 수도, 라주미힌과 함께 출판업에 종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노력과 성실함을 통해 생을 꾸려나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는 자만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더 나은 존재, 더 고귀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파를 살인한 후부터 라스콜니코프는 엄청난 정신적 고뇌를 겪으며, 그의 고뇌는 육체에서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라스콜니코프의 행동들은 바벨탑의 신화의 그것처럼, 인간의 자만의 대가인 신으로부터의 파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스비드리가일로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회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냥’ 욕망에 충실한 존재이다. 그의 욕망에는 도덕도, 신의 법칙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는 여성을 강간하고,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의 행동들을 마치 비가 내리고, 화산이 터지는 자연 현상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곳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비가 그냥 내리고, 화산이 그냥 터지는 것처럼 그의 행동들 역시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그는 마르파 페트로브나와 결혼을 하는데, 많은 독자들이 그에게 경제적인 지원까지 해주며 구애하는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의 동기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생각하고 넘기는 (혹은 ‘퉁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행위 또한 도프토옙스키의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마르파의 행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능적이다. 첫 번째는 회의주의를 대표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정교도로서 도스토옙스키가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을 돈을 제공하여, 돈을 이용하여 인격적 파탄을 즐기는 나쁜 사람이라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에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러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살을 통해 정교의 우위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마르파의 죽음은 스비드리가일로프를 ‘과거에 방황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삶의 허망함을 느끼고 자살하는 남자’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인물로 변형시키면서, 회의주의적 인물에 대한 비판과 죽음을 통한 파멸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한다.


 나는 앞서 인간 지식의 전제조건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소개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소설을 통해 고통과 회개를 통한 신비주의의 승리를 선언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서 합리주의를 대표하는 라스콜니코프는 결과적으로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소냐를 통해 구원에 길로 상승한다. 같은 의미에서 두냐에게 거절당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살은 성녀로부터도 구원을 거부당한 존재의 비참한 최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마르멜라도프, 라스콜니코프,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모두 동일한 인물로 상정하는 분신론도 무리한 이론은 아닐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 남자는 모두 진리에서 떨어져 방황하는 부류의 인간을 형성화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을 구원하는 존재는 신비주의적 속성을 가진 그들 주위의 여성들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유의해야할 점은 지금까지의 분석을 볼 때 이러한 도스토프옙스키의 시선은 결코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와 벌] 속의 여성들이 성녀화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들은 스스로 성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필요에 의해 성녀가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은 기독교의 고난 논리에 입각한 폭력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라스콜니코프가 도달한 도둑맞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앞서서 내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 소설은 모든 인물들의 행동과 상황이 모두 소냐의 성녀화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 가난한 집안과 매춘부라는 상황으로부터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타락을 겪는 소냐가, 그녀 내면의 순수함을 지킴으로서 성녀화 되는 것이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의 막바지에서는, 마땅히 소냐에게 가야할 구원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라스콜니코프에게 향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는, 라스콜니코프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냐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냐가 라스콜니코프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차라리 잘생겨서 반했다고 하면 설득력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그녀에게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마르멜라도프의 장례식 비용을 (그의 어머니의 돈으로) 지불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로 받은 돈을 소냐의 가족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데 지불한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의 첫 만남이 소냐가 라스콜니코프가 돈을 지불해준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성사되었다는 사실도 상기해보자. 


 즉, 라스콜니코프는 명백히 갑과 을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 아래에서 그녀에게 자신의 죄악을 털어 놓는다. 나는 조금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에게 자신의 죄악을 털어놓는 장면은 사실상 면죄부 구매라는 역사적 사실과 대응되는 정신적 매춘에 해당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소냐와 자신을 모두 선을 넘은 사람들로 규정하는 라스콜니코프의 시선 역시 다소 무리가 있다. 소냐에게 매춘은 생존의 방편이었지만, 라스콜니코프에게 살인은 과잉된 자의식의 표출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인 라스콜니코프를 언제까지 품어주고, 받아주고, 회개하도록 도와주는 존재로서 성녀가 되는 소냐는 과연 구원을 얻은 것일까. 나는 인간 지식의 조건을 전제함에 있어, 회의주의와 합리주의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 인지할 필요는 있지만, 정작 도스토옙스키가 그 대안으로서 추구한 신비주의적 구원이 작품 속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소냐는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그녀는 성모 마리아가 되어야 하고, 매춘부에서 회개하여 사도가 된 막달라 마리아가 되어야 하고, 믿음을 통해 동생 라자로를 부활시킨 마르타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의해야 할 점은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가 아니라 소냐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대학 교수님께 들은 성서 속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야곱에게는 두 아들과 정의(Justice)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막내딸 디나가 있었다. 야곱은 작은 부족을 이끄는 나그네로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 왕이 다스리는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왕의 아들이 디나를 보고 반하여 그녀를 겁탈하여 부인으로 삼는 약탈혼을 시도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이후 야곱에게 땅과 식량을 나누어주며 사돈관계가 될 것을 정중히 제안하였는데, 야곱은 그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디나의 오빠들은 그녀의 여동생이 당한 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꾀를 내어 왕에게 성 안 사람들 모두가 할례를 받는다면 디나를 보내줄 수 있다고 제안하였고, 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할례를 받게 되는데, 디나의 오빠들은 성 안의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 움직임이 불편한 시기를 이용하여 병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침투하고, 성 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세력이 약한 자신의 부족이 다른 세력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여 두 아들을 나무랐지만, 두 아들은 여동생이 창녀처럼 취급받는 것을 내버려 두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오히려 더 화를 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아들들의 판단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이 이야기에서, 도대체 디나(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동일한 질문의 다른 판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죄와 벌] 속에서 도대체 소냐는 어디에 있는가.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혹은 라자로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라스콜니코프와 소냐의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최고의 문장: “죽였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과연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이나? 사람을 죽이러 갈 때, 과연 그 때 내가 한 것처럼 할까 말이야! 언제 당신에게 이야기해 주지, 내가 어떤 식으로 갔는지. 내가 과연 노파를 죽인 걸까? 나는 나 자신을 죽인 거야. 노파가 아니라! 어쨌거나 그로써 나 자신을 작살낸거야, 단번에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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