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하지 않는 삶

by 최은규

최근에 연서글서 작가님이 추천해 주신 책 <공허의 시대>를 읽었다. 입시교육을 사업 아이템으로 하는, 세속주의 끝판왕 회사인 스터디코드의 창업자 조남호님이 이런 책을 썼다는 게 의아해서 미심쩍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입시를 놓고 학생들에게 독한 말을 하더니, 인생마저 어떤 정답을 정해놓고 우리한테 훈시하려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고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요지를 요약하면 "결과와 무관하게 어떤 일이든 전심을 다해 충만하게 느낀다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나는 특히 경험을 차별하지 말라는 부분에서 뼈를 맞았다. 나는 경험 차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에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일에 몰입해서 지낸다. 반면 식사나 집안일 같은 잡일은 최대한 빠르게 치워버려야 할 인생의 짐짝 취급을 했다. 매 끼니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성가시다고 느꼈다. 드래곤볼의 선두 같은 게 빨리 개발돼서 알약을 밥 대신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삶의 큰 줄기에서 별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취라는 게 통제할 수 없으며 외려 공허한 일이라면, 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나는 차별주의자로서 내 삶의 멀쩡한 조각들을 내다 버리고 살아온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독후 실천의 일환으로 가급적 사소한 일이라도 멀티태스킹을 줄이고 그 일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시금치를 데칠 때도, 식기세척기에 그릇 테트리스를 할 때도, 양치를 할 때도, 빨래를 갤 때도, 운동을 할 때도 온전히 내 감각과 작업 그 자체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노래도 팟캐스트도 듣지 않는다. 이 일을 빨리 치워버리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차별받아 버려졌던 시간들을 하나씩 내 삶의 일부로 붙여가고 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근육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맛있다'라고 외치는 변태 헬스인들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다. 어떤 경험이든 그 자체로 맛있는 부분이 있다. 일상에서 흔히 들리는 소리도 ASMR 영상에서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ASMR 제작자가 그 감각을 강조하고 집중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도 집중해서 감각을 온전히 느끼면 그 자체로 특별한 경험이 된다. 그간 스스로의 경험을 차별했을 뿐이다.



의존성은 독이다

내가 어쩌다 경험 차별주의자가 되었나를 들여다보면, 결국 과정의 가치를 결과라는 요소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를 예상하고 과정을 자꾸 거기에 비춰볼 때 어떤 일은 초라해지고 어떤 일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내 목줄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코끼리에 묶어두니 삶은 불안해지고, 코끼리를 다루는 데 도움이 안 돼 보이는 일은 전부 스트레스가 될 뿐이었다.


naver_com_20120410_095706.jpg 목줄을 함부로 주지 말자


소프트웨어 공학에서도 과도한 의존성은 만악의 근원이다.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 설계 기술이 이 의존성을 줄이는 부분에 집중돼 있다. 의존성이 높을수록 코드를 수정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진정 삶이 자유롭고 싶다면 의존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예컨대 상향혼으로 팔자를 펴보려는 사람, 승진에 목을 매는 회사원, 환율에 자존심을 건 유권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결과에 대한 의존성을 끊어버리는 건 삶을 자유롭게 유영하게 해주는 정말 멋진 생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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